“나랑 하자” 은밀히 연락한 YS, “도와달라” JP 앞 주저앉은 DJ (96)

  • 카드 발행 일시2024.03.08

1997년 대선의 해가 밝았다. 대한민국의 20세기를 매듭짓고 21세기를 열어나갈 대통령을 선출하는 시기다. 언론이 신3김시대라고 부른 90년대 정치는 나와 김영삼·김대중의 역정과 신념이 흩어져 부딪히고 새로 조합돼 재구성하던 공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

97년 1월 4일 신년회견에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이번 대선은 마지막 3김씨의 싸움이다. 제3의 후보가 나오긴 힘들 것이다. 3김의 싸움은 반드시 밟아야 할 과정이고 현실이며 순서다.” 3김 최후의 격돌을 예고했다고 할까. YS는 자신이 출마할 수 없지만 평생 경쟁자인 DJ의 집권만은 막아야겠다는 일념으로 후계구도를 짜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DJ는 오매불망(寤寐不忘) 대통령을 향한 도정(道程)에 나를 끌어들여 반드시 당선하겠다는 집념으로 넘쳐났다.

나는 나라의 전환기적 도약과 정치발전을 위해 내각책임제를 대선 정국의 핵심카드로 던졌다. 내가 대통령이 돼 직접 내각제를 구현하든지, 아니면 내각제를 받아들일 정당과 힘을 합쳐 대선후보를 단일화하겠다는 생각이었다. 이런 열기와 대립 속에서 3김씨와 관계없는 제3의 후보는 사실상 등장하기 어렵다. 이회창·이인제 후보는 나중에 변색(變色)되긴 했으나 처음부터 YS가 직접 키우고 길렀던 후계자들이었다. 구태정치라는 비난도 있었지만 시대 흐름은 거쳐야 하는 과정과 단계가 있는 법이다.

1996년 12월 19일 김종필(JP) 자민련 총재(오른쪽)와 김대중(DJ) 국민회의 총재가 서울 여의도 전경련회관에서 열린 양당 합동 송년회에서 함께 ‘고향의 봄’을 부르고 있다. 중앙포토

1996년 12월 19일 김종필(JP) 자민련 총재(오른쪽)와 김대중(DJ) 국민회의 총재가 서울 여의도 전경련회관에서 열린 양당 합동 송년회에서 함께 ‘고향의 봄’을 부르고 있다. 중앙포토

97년 대선 무대의 반은 나와 김대중, 즉 자민련과 국민회의의 공조로 굴러갔다. 그전 96년 11월 1일 김대중·김용환 간에 서울 목동 비밀회동이 있었다. 요지는 DJ가 내각제 개헌을 약속하면 양당은 단일후보를 낸다는 것이었다. 김대중은 원칙적으로 내각책임제를 약속했다. 다만 그 약속을 과연 믿을 수 있느냐가 문제였다. DJ는 고난과 투쟁으로 점철된 야당의 길을 걸었지만 이념과 이력에서 신뢰하기 어렵다는 평판·이미지가 쌓인 것도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