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도 들었다놨다’ 전략가…이승만, 미치광이 전술 썼다

  • 카드 발행 일시2024.02.22

영화 ‘건국전쟁’이 21일 개봉 3주 만에 관객 80만 명을 돌파하며 화제를 모으고 있습니다. 이 영화가 1일 개봉할 때만 해도 이런 성적을 거두리라 예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건국전쟁’이 예상 밖 흥행에 성공한 요인을 놓고 그간 상대적으로 가려져 있던 이승만 전 대통령의 ‘공(功)’을 집중 조명하면서 보수층을 극장으로 이끌어내고 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습니다. ‘런승만’ ‘독재자’ ‘친일파’ 등 부정적 이미지가 대부분이었던 그에 대한 긍정적 분석이 새로운 현상을 낳고 있다는 것이죠.

특히 그의 재임 기간 결정된 한·미 동맹(안보)과 농지개혁(경제)이라는 두 개의 축에 대한 관심이 뜨겁습니다. 한·미 동맹은 미국의 세계 전략 속에서 한국이 일방적으로 떠안게 된 ‘굴레’라는 주장까지 제기됐지만, 자료가 발굴되면서 실은 그 반대에 가깝다는 것이 확인되기도 했습니다.

이승만의 기대와 실망

이승만이 얼마나 비협조적이고, 심지어 반항적이었는지를 다 열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는 너무나 마음에 들지 않는 동맹자(an unsatisfactory ally)였다.

1953년 7월 24일. 휴전협정이 체결되기 3일 전,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미 대통령이 남긴 일기장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이후엔 문맥 편의상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아이젠하워로, 이승만 대통령은 이승만으로 줄여서 호칭)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12월 드와이트 아이젠하워가 미국 대통령 당선인 신분으로 한국을 방문했다. 아이젠하워 당선인과 함께 최전선을 시찰한 이승만 대통령이 태극기를 전달하고 있다. 중앙포토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12월 드와이트 아이젠하워가 미국 대통령 당선인 신분으로 한국을 방문했다. 아이젠하워 당선인과 함께 최전선을 시찰한 이승만 대통령이 태극기를 전달하고 있다. 중앙포토

흔히 이승만은 한국에서 ‘친미’라는 꼬리표가 달려 있지만, 그의 집권기 대부분은 워싱턴과의 갈등으로 점철돼 있었습니다. 심지어 6·25전쟁 후반부엔 미국에서 이승만 제거 계획-‘플랜 에버레디(Plan Everready)’를 검토할 정도로 악화일로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