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약을 사포로 문질러댔다…목숨 건 ‘백곰 수술’의 전말

  • 카드 발행 일시2024.01.11

1978년까지 사거리 500㎞의 지대지 유도탄을 개발할 것.

이것이 1974년 박정희 대통령이 국방과학연구소(ADD)에 내린 지시의 핵심이었다. 하지만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아무런 준비도 돼 있지 않은 상황에서 달성하기엔 지나치게 높은 목표였다. 이에 ADD는 최종적으로 대통령이 원하는 시기에 최대한 맞추되, 사거리는 조금 줄이는 방향으로 개발 목표를 설정했다. 그리하여 최종 설정된 개발 기한이 1979년이었다.

국방과학연구소(ADD)의 안흥시험장. 플래닛미디어

국방과학연구소(ADD)의 안흥시험장. 플래닛미디어

그런데 1976년 미국에서 지미 카터가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이런 개발 일정을 다시금 단축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카터는 1978년부터 1982년까지 주한미군 가운데 지상군 전체를 철수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우리 대통령과 정부로서는 국방을 더 이상 미군에만 의지할 수 없는 절박한 상황이 됐던 것이다. 이에 박 대통령은 1978년 국군의 날 이전에 첫 국산 지대지 유도탄의 개발을 완료하라는 새로운 명령을 ADD에 하달했다.

눈 뒤집어쓴 연구원들 모습에서 ‘백곰’ 이름 유래

1978년 국군의 날까지라는 일정에 맞추기 위해서는 늦어도 1978년 봄까지는 모든 분야의 개발을 완료하고 비행시험을 시작해야 했다. 이 임무를 수행하려고 ADD의 연구원들은 야근을 밥먹듯이 하면서 미사일 개발에 전념했고, 실제로 1978년 4월 첫 시험발사를 할 수 있었다.

백곰에 사용된 유도조종장치의 부품. 플래닛미디어

백곰에 사용된 유도조종장치의 부품. 플래닛미디어

안흥시험장에 파견된 연구원들 역시 밤낮을 가릴 겨를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눈보라가 매섭게 몰아치는 한겨울에 차량도 없이 떼 지어 시험장 곳곳을 오가는 연구원들의 모습이 마치 북극지방의 눈보라 속에 어슬렁거리는 곰 같았다는 데서 이 미사일의 별칭 ‘백곰’이 유래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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