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한국은 엄청난 안보 위기를 맞습니다. 미국은 ‘자신의 안보는 자신이 지켜라’는 ‘닉슨 독트린’을 내세우며 주한미군 지상군 1개 사단을 철수하더니 아예 주한미군 전체를 빼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한국은 군사력에서 북한에 뒤졌을뿐더러 소총 한 정조차 제대로 만들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이처럼 절박한 심정으로 시작한 게 국산 최초의 지대지 탄도미사일 ‘백곰’입니다. 백곰을 만들어내기까지 흘린 수많은 피와 땀, 그 자세한 내막을 들여다보시죠.
크리스마스 다음 날인 1971년 12월 26일, 방위산업과 중공업 발전을 담당하는 오원철 청와대 경제제2수석이 박정희 대통령의 호출을 받고 서재로 들어섰다. 대통령은 지도를 가리키며 오 수석에게 설명했다.
서울이 휴전선에서 너무 가깝단 말이야. 40㎞밖에 안 돼. 북한군은 프로그(Frog) 미사일을 최전방에 배치했다는데, 서울이 사정권 내가 된단 말이야. 그런데 반대로 평양은 전선에서 160㎞나 떨어져 있어. 항공기로 폭격할 수밖에 없는데, 비행기로 가려면 폭탄 싣는 시간, 이륙하는 시간 등을 합치면 몇십 분이 걸리게 되지. (중략) 우리도 대항할 방법을 갖고 있어야 해.
그러면서 박 대통령이 가리킨 지도에는 손수 컴퍼스로 그린 여러 개의 동심원이 표시돼 있었다. 서울을 중심으로 50㎞, 100㎞, 150㎞, 200㎞의 거리가 빨간 색연필로 그려져 있었던 것. 박 대통령이 다시 입을 열었다.
6·25 후에 대전을 수도로 정했더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오 수석, 우리도 평양을 때릴 수 있는 유도탄을 개발하지. 시간이 걸리더라도 지금부터 시작해야 하겠네.
그러면서 탁자에 앉더니 메모지를 꺼내 글을 쓰기 시작했다. 다음은 대통령이 써주었다는 메모의 내용으로, 오원철의 『한국형 경제건설』(기아경제연구소, 1996) 제5권에 실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