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이, 고속도로 얘기했어?” 박정희와 통한 ‘韓 아우토반’ (37)

  • 카드 발행 일시2023.10.11

조국 근대화의 도정에 공백(空白)이란 있을 수 없었다. 앞에 있을 때는 미지(未知)의 세상을 열어 나갔고, 뒤에 물러났을 땐 방치(放置)된 문제를 풀어 나갔다. 5·16 혁명 2, 3년 뒤에 있었던 나의 이른바 1, 2차 외유는 정치의 시각에서 보면 권력의 자리에서 내려온 것이다. 하지만 그 시기에 일선을 떠난 아쉬움이나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섭섭함 같은 것은 없었다. 나는 여전히 할 일이 있었다. 나라의 빈곤을 물리치고 국민에게 항산(恒産·재산이나 생업)의 기회를 제공할 숱한 일이 곳곳에서 보였다. 1차 외유(1963년 2월 25일~10월 23일) 때 나는 주로 유럽을 돌아다녔다.

1963년 7월 초순 서독에 갔더니 신응균 대사가 흥미로운 말을 했다. 그는 “서독은 전후 복구와 경제개발정책 추진으로 완전고용 상태에 도달해 부족한 노동력을 아프리카, 동남아로부터 충당해 오고 있다. 57년부터 일본에서 매년 400명을 유입해 왔으나 올해 말이면 계약 기간이 만료된다”고 전했다.

신 대사에 따르면 62년 5월 서독의 M·A·N사(社)가 우리 대사관에 한국인 근로자 500~1000명을 고용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해 왔고, 63년 5월에는 서독 노동부가 한국인 광부 250명을 고용하겠다고 희망해 와 본국 정부에 보고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때까지 정부로부터 아무런 응답이 없다는 것이다. 혁명정부는 당시 경제개발 5개년계획 2년째를 맞아 외국 자본과 기술 도입이 절실했다. 노는 인력의 해외 송출도 시급한 때였다. 나는 “그게 무슨 소리냐. 이런 좋은 기회가 왔는데 본국에서 느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말이냐”며 혀를 찼다. 나는 우선 “광부들이 오면 어디서 어떤 방식으로 일하는지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신 대사에게 부탁했다. 이튿날 신 대사와 루르 지방에 있는 함보른 탄광으로 갔다. 서독 정부에서도 사람이 나왔다. 지하로 수직 1000m, 수평 700m를 들어가니 탄광의 막장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