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핑은 언제까지 집권할까…“주변 봐라, 2037년까진 간다”

  • 카드 발행 일시2023.10.04

제4부: 시진핑의 과제

제4장(최종회): 시진핑은 언제까지 집권할까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언제까지 집권할까? 후계 구도가 전혀 보이지 않아 2037년까지 25년간 집권할 수도 있다. 사진은 지난 3월 전국인민대표대회 때의 시진핑. 사진 신화망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언제까지 집권할까? 후계 구도가 전혀 보이지 않아 2037년까지 25년간 집권할 수도 있다. 사진은 지난 3월 전국인민대표대회 때의 시진핑. 사진 신화망

시진핑(習近平)이 4연임에 도전할까? 지난해 10월 중국 공산당 제20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세 번째 총서기가 되고 또 지난 3월엔 세 번째 국가주석으로 선출된 시진핑이 2027년엔 과연 네 번째 총서기에 오르며 20년 집권의 서막을 열 수 있을까? 이는 그리 어려운 질문이 아니다. 무조건 그렇게 된다고 보면 된다. 왜? 시진핑을 이을 후계자가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시진핑이 20년이 아니라 25년 정도 집권할 가능성도 크다고 본다.
중국의 지도자 양성은 꽤 오랜 시간을 거친다. 시진핑 자신이 최고 지도자로 발탁되는 과정을 보자. 시진핑 평전을 쓴 양중메이(楊中美)에 따르면 중국 공산당 지도부는 1995년 미래의 후계자 기준을 마련했다. 1997년 15차 당 대회가 열리기 2년 전인데 이때 벌써 2002년 16차 당 대회 때 지도부에 입성할 재목 고르기에 나선 것이다. 기준은 당성이 강하고 업무 능력이 있으며 청렴하고 특히 16차 당 대회 개최 때 50세 이하여야 했다.

시진핑, 20년 아닌 25년 집권도 가능 

이런 잣대로 보니 시야에 들어온 게 당시 40세로 공산주의청년단(共靑團) 제1서기인 리커창(李克强)과 42세로 푸젠(福建)성 당 부서기인 시진핑이 떠올랐다. 그래서 15차 당 대회 때 리커창을 당 중앙위원으로, 시진핑은 당 중앙후보위원으로 만든다. 이처럼 지도자 양성은 오랜 시일에 걸쳐 이뤄진다. 한데 시진핑 집권 이후 후계 구도와 관련해 가장 눈에 띄는 건 시진핑의 대를 이을 인물이 전혀 배양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장우웨(張五岳) 대만 단장(淡江)대학 교수는 시진핑의 뒤를 이으려면 적어도 세 가지 직책을 동시에 갖고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첫 번째는 당 최고 지도부의 업무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훤히 꿰기 위해 당 중앙서기처 상무서기가 돼야 한다. 보통 서열 5위의 정치국 상무위원이 그런 자리를 맡는다. 이는 서열 1위 국가주석, 2위 총리, 3위 전국인민대표대회(全人大) 상무위원장, 4위 인민정치협상회의(政協) 주석 다음의 자리에 해당한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후계자가 되려면 현재 네 자리에 올라 있어야 한다. 당 중앙서기처 상무서기, 국가부주석, 중앙군사위 부주석, 중앙당교 교장 등이 그런 자리다. 한데 현재 이 네 자리를 모두 다른 사람이 맡고 있다. 왼쪽부터 차이치, 한정, 장유샤, 허웨이둥, 천시. 사진 바이두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후계자가 되려면 현재 네 자리에 올라 있어야 한다. 당 중앙서기처 상무서기, 국가부주석, 중앙군사위 부주석, 중앙당교 교장 등이 그런 자리다. 한데 현재 이 네 자리를 모두 다른 사람이 맡고 있다. 왼쪽부터 차이치, 한정, 장유샤, 허웨이둥, 천시. 사진 바이두

두 번째는 국가부주석이 돼야 한다. 5년 후엔 중국을 대표하는 국가주석이 돼야 하므로 미리 예행연습을 하는 것과 같다. 세 번째는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는 마오쩌둥(毛澤東)의 유명한 말이 있듯이 무력 장악을 위해 중앙군사위 부주석에 올라 있어야 한다. 장우웨가 거론하지 않은 한 가지 직책을 더 들면 중앙당교(中央黨校) 교장 자리다. 당교는 정치 간부가 양성되는 곳으로 교장이 돼 이들과 사전 네트워킹을 단단히 해야 한다.

장쩌민(江澤民)을 이은 후진타오(胡錦濤)나 후진타오 다음의 시진핑이나 모두 이 네 자리에 올라 후계자 수업을 받았다. 그러나 시진핑 집권 이후엔 이들 직책을 한 사람이 갖는 경우가 없다. 모두 다르다. 만일 시진핑이 2027년 가을 열리는 21차 당 대회에서 대권을 물려줄 생각이 있다면 지금 위의 네 자리를 동시에 차지하고 있는 사람이 존재해야 한다. 그러면 그는 황태자를 뜻하는 ‘추쥔(儲君)’으로 불릴 것이다.

황태자는 당·정·군·학(黨政軍學) 장악해야 

하지만 그런 인물은 없다. 먼저 현재 중앙서기처 상무서기는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서열 5위인 차이치(蔡奇)다. 1955년생인 차이치는 시진핑의 후계자는 아니다. 두 번째 직책에 해당하는 국가부주석은 현재 한정(韓正)이 맡고 있다. 한정 역시 1955년생으로 지난 19차 당 대회 때 서열 7위의 정치국 상무위원이었다가 이번에 한직 비슷하게 밀려난 경우다. 권력 승계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세 번째 자리인 중앙군사위 부주석엔 72세의 장유샤(張又俠)와 66세의 허웨이둥(何衛東)이 올라 있다. 나이도 그렇고 모두 직업 군인으로서 시진핑의 뒤를 잇는다는 건 가당치 않다. 그럼 중앙당교 교장은 누가 맡고 있나. 시진핑의 칭화(淸華)대학교 동갑내기 친구인 천시(陳希)다. 이를 볼 때 시진핑이 자신의 세 번째 5년 임기를 시작하고 있으면서도 후계 문제에 있어선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음이 그대로 드러난다.

마오쩌둥은 후계자 선발에 있어 공적 측면에선 류사오치 등을, 사적인 측면에선 부인 장칭 등을 선발했다. 사진은 1949년 4월 베이징 샹산에서 찍은 마오의 가족사진.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장칭, 마오, 아들 안잉, 며느리 류숭린, 딸 리너. 사진 바이두

마오쩌둥은 후계자 선발에 있어 공적 측면에선 류사오치 등을, 사적인 측면에선 부인 장칭 등을 선발했다. 사진은 1949년 4월 베이징 샹산에서 찍은 마오의 가족사진.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장칭, 마오, 아들 안잉, 며느리 류숭린, 딸 리너. 사진 바이두

후계자 낙점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역사를 볼 때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양중메이에 따르면 마오쩌둥은 후계자 선발과 양성을 공적인 측면과 사적인 측면의 두 갈래로 나눠 진행했다. 공적인 측면에선 류사오치(劉少奇), 린뱌오(林彪), 왕훙원(王洪文), 덩샤오핑(鄧小平), 화궈펑(華國鋒) 등을 선발했다. 사적인 측면에선 아들 마오안잉(毛岸英), 딸 리너(李訥), 조카 마오안신(毛岸新), 부인 장칭(江靑)을 발탁했다.

류사오치는 이론과 실무에 능했으며 오랜 투쟁 경력으로 그의 당내 2인자 자리는 장기간에 걸쳐 역사적으로 형성됐다는 게 덩샤오핑의 설명이다. 마오가 직접 선발한 건 아니다. 따라서 마오는 류샤오치 제거를 위해 문화대혁명 발동과 린뱌오의 무력이 필요했다. 마오는 이후 1969년의 9차 당 대회 때 당장(黨章)에다가 린뱌오를 자신의 후계자라고 명기까지 했지만, 권력을 물려줄 생각은 없었다.

마오가 바랐던 후계자는 아내인 장칭 

결국 린뱌오 실각 이후 마오는 이번엔 자신의 젊을 때와 모습이 비슷한 왕훙원을 선택한다. 왕훙원은 농민 출신으로 노동자로 일도 했고 군인으로 근무하기도 했으며 반골 성향을 보이는 등 마오를 상당 부분 닮은 측면이 있었다. 그러나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그러자 이번엔 덩샤오핑을 불러내 장칭이 후계자가 되는 걸 돕도록 했지만, 덩이 이를 거절하자 과도기 인물로 화궈펑을 택하기에 이른다.

“네가 맡으면 내가 안심이다. 일이 생기면 장칭을 찾아라(你辦事 我放心 如有事 找江靑).” 마오가 화궈펑에게 준 쪽지에 적힌 글이라 한다. 마오는 원래 아들 안잉을 키우고 싶었으나 한국전쟁에서 그만 전사하고 말았다. 딸 리너는 아무리 해도 후계자 재목이 아니었고, 조카 마오안신은 인민의 기대에 전혀 부응하지 못했다. 그래서 마오는 만년에 장칭을 후계자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장쩌민(왼쪽)은 과도기 지도자로 갑작스레 발탁됐지만 특유의 타협 정신으로 중국을 번영으로 이끌었고, 후진타오(오른쪽)는 덩샤오핑의 발탁으로 지도자가 됐다. 사진 바이두

장쩌민(왼쪽)은 과도기 지도자로 갑작스레 발탁됐지만 특유의 타협 정신으로 중국을 번영으로 이끌었고, 후진타오(오른쪽)는 덩샤오핑의 발탁으로 지도자가 됐다. 사진 바이두

마오 입장에서 후계자는 마오의 정치 노선을 계승하고 문혁을 긍정하며 마오에게 충성하는 것이었는데 마지막으로 장칭 외엔 그런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결국 마오 시대 후계자 인선의 가장 큰 잣대는 마오에 대한 충성 여부였다. 덩샤오핑도 후계자 문제로 애먹었다. 덩은 후야오방(胡耀邦)과 자오쯔양(趙紫陽), 장쩌민 등 세 명을 후계자로 세웠고, 후진타오를 격대지정(隔代指定, 한 세대를 건너뛰어 미리 낙점)의 방식으로 선발했다.

후야오방과 자오쯔양은 덩샤오핑이 추구한 개혁개방의 오른팔과 왼팔에 해당하는 핵심 인물이었지만, 문제는 이들이 민주적인 정치개혁 의식을 가졌다는 점이었다. 덩이 결국 이 둘을 내친 건 공산당 일당 전제(專制)에 대한 이들의 입장이 흔들리고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덩의 후계자 인선 기준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경제적으론 개혁개방 노선을 추진하는 것이고, 정치적으론 중국 공산당 일당 전정을 지지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