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 팔아먹은 제2 이완용” 들끓는 캠퍼스에 들어간 JP (30)

  • 카드 발행 일시2023.09.20

1962년 11월 ‘김-오히라 메모’를 이끌어낸 후에도 한·일 회담 최종 타결까지 3년 가까이 산통을 겪어야 했다. 협상 자체도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양국 내부에 수교(修交)를 반대하는 세력들의 목소리가 높아졌기 때문이다.

64년 3월 20일 나는 공화당 의장 신분으로 다시 도쿄를 방문했다. 61년 한·일 회담 재개를 위해 이케다 총리와 비밀회담을 한 이래 일곱 번째 일본 방문이었다. 밤 9시가 넘어 하네다공항에 도착했는데 일본 사회당계 전학련(全學聯) 소속 학생 200여 명이 나타나 나의 방일을 반대하는 데모를 하느라 시끄러웠다. 이튿날 오노 반보쿠(大野伴睦) 자민당 부총재, 23일 오히라 외상, 24일 이케다 총리를 각각 만나 4월 초에 양국 외무회담을 열어 회담을 마무리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 인물 소사전: 오노 반보쿠(大野伴睦·1890~1964)

1960년대 자유민주당 부총재를 지낸 일본 정계의 거물 정치인. 8개 파벌로 분열돼 있던 자민당을 통솔할 수 있는 실력자였다. 건설·농림상 등을 지낸 고노 이치로(河野一郞) 중의원 의원과 함께 한·일 회담을 반대한 대표적 인사였지만 김종필 전 총리를 만난 뒤 입장을 바꿨다. 62년 대규모 방한단을 이끌고 서울에서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을 만났다. 한·일 수교 회담의 막후에서 결정적인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서울 상황은 긴장이 고조되고 있었다. 3월 24일 서울대 교정에선 서울대·고려대·연세대 학생 3000여 명이 모여 소위 ‘제국주의자 및 민족반역자 화형식’을 벌였다. ‘굴욕적 한·일 회담을 즉시 중지하라. 도쿄에 체류 중인 매국 정상배(政商輩)는 즉각 귀국하라’는 결의문도 채택했다. 나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학생들은 나에게 ‘나라 팔아먹는 제2의 이완용이다’라는 등 별의별 말을 다했다.

25일 오후 내가 묵고 있는 도쿄 힐튼호텔도 소란스러웠다. 일본 경시청 경찰들이 방으로 올라왔다. 조총련계 대학생 400여 명이 쳐들어와 “매국노는 물러가라”며 시위를 하고 있으니 조심하라고 전했다. 경찰은 단도를 갖고 있는 놈들이 여럿이라고 했다. 서울의 학생 데모를 지원하는 세력들이었다. 나는 학생 대표 20~30명을 뽑아 데리고 오라고 했다. 그들 중 한 학생이 자리에 앉자마자 일본말로 “매판자본을 들여다가 경제적으로 예속시키려고 하는 교섭은 나라를 팔아먹는 짓이다. 당장 그만두라”고 주장했다. 게이오(慶應)와 와세다(早稻田)대에 다니는 엘리트들이었지만 한국말을 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