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총리 면전에 “돈 많이 내라”…나라 일으킬 밑천 필요했다 (26)

  • 카드 발행 일시2023.09.11

1961년 가을, 고민이 깊어갔다. 혁명정부는 정치적으로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지만 나라의 빈곤을 몰아내고 근대화를 이루기 위한 해법을 어떻게든 마련해야 했다. 때마침 미국의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에게 11월 14일 정상회담을 하자고 공식 초청했다. 나는 박 의장의 방미를 교착상태에 빠진 한·일 협상 타개와 연계하려 했다. 오랜 시간 속에 숙성된 생각이었다. ‘나라를 일으키려면 밑천이 있어야 한다. 밑천이 나올 수 있는 곳은 대일(對日) 청구권뿐이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극비리에 중앙정보부 일본 라인을 통해 나와 이케다 하야토(池田勇人) 일본 총리의 면담을 추진시켰다. 박정희 의장에게는 일이 거의 성사된 단계에서 보고드렸지만 다른 사람들은 일절 모르게 했다. 내가 이렇게 비밀을 유지한 까닭은 중앙정보부장이라는 신분 때문이었다. 외국 총리를 만나는 외교 행위에 비밀을 다루는 국가 정보기관의 장이 나설 성격이 못 되는 것이었다. 한·일 회담 재개 같은 민감한 문제가 사전에 새나가면 꼭 가타부타하는 사람들이 생겨 일을 그르치게 하는 것도 보안을 지켰던 이유였다. 박 최고의장 옆에는 벌써부터 재간을 부리며 일일이 반대할 이유를 찾아내 문제를 일으키는 측근들이 생겼다.

🔎 인물 소사전: 이케다 하야토(池田勇人·1899~1965)

제 5, 6, 7차 한·일 회담 당시 일본 총리(1960~64년). 히로시마 출신으로 교토제국대학을 졸업했다. 1925년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해 대장성에서 관료생활을 시작했다. 재무·통산장관을 지내고 1960년 자민당 총재에 취임, 같은 해 총리에 올랐다. 일본 고도성장의 기초를 닦고, 안보조약을 기본노선으로 하는 친미정책을 추진했다. 김종필 중앙정보부장과 비밀회동에 이어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과 정상회담을 통해 한·일 회담에 속도를 냈다.

61년 10월 24일 도쿄 왕궁 앞에 새로 지은 뉴 팔레스라는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저녁 식사를 하고 옥상에 올라가 봤는데 그 앞 도로가 줄지어 달리는 자동차 헤드라이트 불빛으로 장관(壯觀)이었다. 오다이바(お台場)란 동네를 보니 집집마다 지붕 위에 안테나가 직립(直立)해 숲을 이루고 있었다. 부러웠다. ‘어떤 어려움이 따르더라도 반드시 이런 나라를 만들겠다. 기필코 경제성장을 이루겠다’는 결기가 일었다.

1961년 11월 11일 일본을 방문한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왼쪽 둘째)이 일본 총리 관저에서 열린 환영만찬에서 이케다 하야토 총리(왼쪽) 등과 환담을 나누고 있다. 오른쪽은 제6차 한·일 회담에 참석 중이던 정일영 대표. 박 의장은 이튿날 이케다 총리와 그의 집무실에서 정상회담을 열고 한·일 국교 정상화 현안을 조속히 타결하는 데 노력하기로 합의했다. 사진 국가기록원

1961년 11월 11일 일본을 방문한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왼쪽 둘째)이 일본 총리 관저에서 열린 환영만찬에서 이케다 하야토 총리(왼쪽) 등과 환담을 나누고 있다. 오른쪽은 제6차 한·일 회담에 참석 중이던 정일영 대표. 박 의장은 이튿날 이케다 총리와 그의 집무실에서 정상회담을 열고 한·일 국교 정상화 현안을 조속히 타결하는 데 노력하기로 합의했다. 사진 국가기록원

이튿날 오전 11시 일본 국회의사당에 있는 총리실에서 이케다 총리를 만났다. 나는 “11월 중순에 케네디 대통령 초청으로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이 미국에 가시게 됐습니다. 박 의장이 방미하는 길에 도쿄에 들러 총리와 정상회담을 하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하러 왔습니다. 한·일 국교 정상화는 우리 혁명과업 중 하나입니다. 회담을 위한 회담이 아니라 해결을 위한 회담을 해야겠습니다”고 용건을 얘기했다. 이케다 총리는 “한·일 회담은 양국의 앞날을 위해 반드시 필요합니다. 박 의장께서 도쿄에 오시면 국빈으로 잘 모시겠습니다”고 답했다. 내가 다시 “두 분의 만남을 위해 제가 먼저 와서 길을 깔아드리는 셈입니다. 그러니 이젠 총리의 친서를 휴대한 특사를 한국에 보내 박 의장의 일본 방문을 정식으로 초청해 주십시오”라고 요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