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은 신세계그룹 명예회장은 무언가에 심취하면 깊이 파고드는 성격으로 각인돼 있다. 2006년 한국 최초의 ‘우주인 선발대회’에 정 명예회장이 당시 69세 나이로 참가한 에피소드는 지금까지도 회자된다. 꽂히면 직진하는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의 성향도 아버지를 닮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정 명예회장은 구단주인 정 부회장 못지않은 SSG 랜더스의 열렬한 팬이다. 그런데 그가 팀을 응원하는 방식이 꽤 독특하다. 민경삼 랜더스 대표는 “정 명예회장께서 이따금 e메일을 보내올 때가 있다. 생체역학에 관한 해외 원서 자료를 보내주신다”고 들려줬다. 바이오메카닉을 ‘실험’ 중인 인천 강화도의 랜더스 퓨처스팀 산하 R&D센터를 염두에 둔 나름의 조력인 셈이다.
R&D(연구개발)는 글로벌 기업의 언어다. 기업이 R&D를 통해 지속가능한 미래 성장 동력을 모색하듯, 야구팀도 선수 육성에 끊임없이 투자해야 강자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다. 2군을 팜(farm) 혹은 퓨처스(futures)라고 지칭하는 데에는 이런 관점이 묻어 있다. 갈수록 FA 몸값이 치솟고, 전력평준화 명목으로 샐러리캡이 시행되는 환경에서 유망주를 발굴, 육성하려는 필연성은 증대된다.
야구팀이 쓴 ‘반성문’
2021년 11월 10일 랜더스는 ‘선수 육성 시스템 전면 개편’이라는 제목의 무미건조한 보도자료를 배포했다. 흥미를 유발하는 내용이 아닌지라 당시 언론의 이목을 거의 끌지 못했다. 하지만 랜더스 프런트 내부에서는 이 보도자료를 “반성문”이라고 불렀다. A4 용지 2페이지 분량에는 ‘1군 주전 선수들의 고령화, 유망주들의 성장 정체, 선수단 연봉 상승’이라는 암울한 현실을 적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