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내리고 본인 사진 걸다, 종교 관대했던 시진핑의 돌변

  • 카드 발행 일시2023.07.12

제2부: 시진핑의 치국책략(治國策略)

제5장: 만리장성에 선 예수…중국 하늘에도 신은 존재하나

중국에선 인민의 영혼 장악을 위해 공산당이 종교보다 먼저 달려간다. 2014년 4월 중국 저장성 원저우시 융자현의 한 교회가 중국 당국에 의해 철거된 모습. 사진 Rfa

중국에선 인민의 영혼 장악을 위해 공산당이 종교보다 먼저 달려간다. 2014년 4월 중국 저장성 원저우시 융자현의 한 교회가 중국 당국에 의해 철거된 모습. 사진 Rfa

중국은 예로부터 스스로를 신주(神州)라 칭했다. 중국 도처에 신령이 존재하는 국가라는 의미가 있다. 그로부터 2000여 년이 흘러 21세기를 맞았다. 과연 종교의 소멸을 추구하는 사회주의 국가 중국의 하늘에는 아직도 신이 존재하는 걸까.

10여 년 전엔 분명히 존재한 것처럼 보인다. 2010년 12월 중국 산시(陝西)성 시안(西安)의 성당에선 한 수녀의 개인 전시회가 열렸는데 흔치 않은 행사로 관심을 모았다.

2010년 12월 중국 시안의 한 성당에서 열린 전시회에 선보인 저우리핑 수녀의 성화 '만리장성에 선 예수'. 사진 신덕망

2010년 12월 중국 시안의 한 성당에서 열린 전시회에 선보인 저우리핑 수녀의 성화 '만리장성에 선 예수'. 사진 신덕망

당시 저우리핑(周麗萍) 수녀는 여러 성화를 선보였고, 이 중 ‘만리장성에 선 예수(耶蘇站在長成上)’가 대표작으로 평가받았다. 중국 대륙에 그것도 중국의 상징인 만리장성에 강림한 예수의 모습에서 사회주의 국가답지 않게 후끈한 종교의 열기를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로 오래가지 못했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 집권 이후 분위기가 싹 바뀐 것이다. 중국인의 영혼 장악을 위해 당이 종교보다 앞서 달리는 모양새다.

마르크스 “종교는 인민의 아편”

2019년 베이징엔 외국인을 상대로 중국 문화강좌를 연 한 센터가 있었다. 수강료가 꽤 비쌌고 오전에 수업이 진행돼 유학생이나 직장이 있는 외국인은 참석하기 어렵다. 그래도 적지 않은 중년의 외국인이 모여 센터는 늘 성업이었다. 재미있는 건 외국인 수강생끼리 서로 뭐하러 중국에 왔는지 이야기를 나누지 않는다는 점이다. 수업에도 그리 큰 관심이 있는 것 같지도 않은데 학기마다 열심히 센터에 학생으로 등록했다. 왜?

중국 체류가 가능한 비자를 받기 위한 것이다. 이 말은 이들이 중국에 오는 데 정상적으론 비자를 받을 수 없었다는 걸 뜻한다. 외국인 대부분은 성직자였다. 문화센터가 수업료를 비싸게 받는 대신 눈 질끈 감고 학생 비자를 받아준 것이다. 문제로 삼으면 문제가 되지만 문제로 삼지 않으면 문제가 되지 않는 중국 상황을 십분 활용했다. 한데 2020년이 되면서 센터는 이 강좌를 폐지했다. 중국 당국이 문제로 삼기 시작한 것이다.

더불어 외국인 성직자 모두 중국을 떠났다. ‘만리장성에 선 예수’ 또한 2020년 이후 더는 중국에 계시지 않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된다. 원래 중국은 종교에 관대한 국가다. 유럽과 달리 중국은 정치와 종교가 일찍이 분리됐다. 하늘의 계시에 의해 정치를 행하는 신권적(神權的) 사고는 이미 주(周)나라 때 깨졌다. 이후 중국은 외래 종교에 관대하고 한 사람이 여러 종교를 믿을 수도 있어 교권(敎權)의 집중화 현상이 나타나지도 않았다.

레닌의 종교 소멸론 주장

그러나 사회주의 국가 중화인민공화국의 탄생은 중국의 영혼에 큰 충격이다. 사회주의가 종교의 궁극적 소멸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고 했지만, 종교와의 투쟁을 말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레닌은 종교를 자산계급이 노동계급을 마취하는 기구라고 비판하며 종교 소멸론을 주장했다. 이에 따라 중국 내 종교는 정치의 필요성에 따라 사망과 부활을 반복하는 호된 시련을 겪고 있다.

건국의 주역 마오쩌둥(毛澤東)은 종교를 믿고 안 믿고는 각자의 자유라고 봤다. 종교는 정신세계의 문제로 정치문제와 성질이 다르다는 거다. 중국의 철학자이자 종교학자 팡리톈(方立天)은 “마오쩌둥은 생전 여러 차례 ‘종교는 문화’라고 말한 바 있다”고 말한다. 중국 헌법에 나타나는 중국 종교정책을 연구한 한국의 신명 박사에 따르면 건국 초기 종교정책을 구체적으로 지도한 사람은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였다.

마오쩌둥은 생전에 여러 차례 "종교는 문화"라는 의견을 피력했다. 사진은 1961년 1월 판첸 라마 10세(왼쪽)와 환담하는 마오쩌둥. 사진 봉황망

마오쩌둥은 생전에 여러 차례 "종교는 문화"라는 의견을 피력했다. 사진은 1961년 1월 판첸 라마 10세(왼쪽)와 환담하는 마오쩌둥. 사진 봉황망

저우는 종교를 가혹하게 억압한 소련의 종교정책이 무수한 순교자와 국민적 저항만 낳는 걸 보고 온건한 종교정책을 추구했다. 그러나 반(反)제국주의와 애국주의를 요구하며 종교의 외투를 입은 반혁명 세력은 허용하지 않는다는 입장은 분명히 했다. 이후 오랫동안 중국 공산당은 종교오성론(宗敎五性論)에 따라 종교를 관리했다. 종교는 ‘장기성, 군중성, 민족성, 국제성, 복잡성’의 다섯 가지 특징을 갖는다며 신중한 접근 방식을 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