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대문 살린 금강송 떼죽음…'소나무 에이즈' 탓 아니었다

남대문 살린 금강송 떼죽음…'소나무 에이즈' 탓 아니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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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울진군 금강송면 금강소나무숲 가운데에 50여 그루의 금강소나무들이 집단 고사해 잎이 갈색으로 변했다. 녹색연합

경북 울진군 금강송면 금강소나무숲 가운데에 50여 그루의 금강소나무들이 집단 고사해 잎이 갈색으로 변했다. 녹색연합

지난달 31일 경북 울진군 금강송면 소광리. 국내 최대 금강소나무 군락지인 이곳에는 100년이 넘는 소나무들이 사계절 내내 푸른 원시림을 이루고 있다.

마을을 지나 산속으로 들어가자 족히 수십 미터는 돼 보이는 금강송들이 붉은빛을 띠면서 하늘로 곧게 뻗어 있었다.

경북 울진군 금강송면의 금강소나무숲. 천권필 기자

경북 울진군 금강송면의 금강소나무숲. 천권필 기자

금강소나무는 한국 소나무의 원형이자 유전적으로 가장 우람하고 건강한 종으로 꼽힌다. 경복궁·남대문 같은 국보급 문화재의 복원에도 사용될 정도로 가치가 매우 뛰어나다.

특히 이곳에서 자라는 금강소나무는 조선 시대부터 국가 산림보호구역으로 지정돼 오랫동안 보호받았다. 당시 궁궐을 짓거나 임금의 관을 만들 때도 이곳의 금강소나무를 가져다 썼을 정도다. 지금도 국보급 문화재의 복원을 위한 문화재 용재림으로 지정해 함부로 벨 수 없도록 했다.

경북 울진군 금강송면 소광리 황장봉계표석. 조선시대에는 황장목(금강송)이 있는 산을 봉산으로 지정해 일반인들이 함부로 벌채하지 못하게 했다. 천권필 기자

경북 울진군 금강송면 소광리 황장봉계표석. 조선시대에는 황장목(금강송)이 있는 산을 봉산으로 지정해 일반인들이 함부로 벌채하지 못하게 했다. 천권필 기자

사계절 푸르러야 할 소나무 하얗게 변해

경북 울진군 금강송면에 집단 고사한 금강소나무들이 앙상한 가지만 남아 있다. 천권필 기자

경북 울진군 금강송면에 집단 고사한 금강소나무들이 앙상한 가지만 남아 있다. 천권필 기자

하지만 최근 고산지대를 중심으로 금강소나무의 떼죽음이 확산하고 있다. 사계절 내내 푸르러야 할 침엽수림이 죽어가고 있다는 신호다. 고사 실태를 살펴보고자 산림 전문가와 함께 산길을 올랐다.

해발 600m 이상 높은 곳에 오르자 능선을 따라 잎이 떨어지고 껍질이 벗겨진 소나무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10그루가 넘는 소나무가 앙상한 가지만 남은 채로 죽어 있었다. 색이 하얗게 바래거나 부러진 나무들도 보였다.

“뿌리에서 올라가는 수분이 공급이 안 되면 위에서부터 서서히 마르다가 어느 순간이 되면 잎이 갈색으로 변하고, 수피(나무껍질)가 서서히 떨어져 나갑니다. 나무가 고사했다는 신호죠.”

동행한 신재수 산림청 국립소광리생태관리센터장이 나무를 가리키면서 설명했다. 그가 나무를 만지자 껍질이 힘없이 떨어져 나갔다.

고사 피해 확산…50그루 떼죽음 당한 곳도

경북 울진과 봉화 지역 금강소나무 고사 현황. 노란색이 2017년 이전, 하늘색이 2018~2019년, 붉은색이 2020년에 고사한 것으로 확인된 금강소나무다. 백두대간과 낙동정맥을 따라 고사 피해가 확산하고 있다. 산림청·녹색연합

경북 울진과 봉화 지역 금강소나무 고사 현황. 노란색이 2017년 이전, 하늘색이 2018~2019년, 붉은색이 2020년에 고사한 것으로 확인된 금강소나무다. 백두대간과 낙동정맥을 따라 고사 피해가 확산하고 있다. 산림청·녹색연합

녹색연합에 따르면 이 지역에 있는 금강소나무의 고사 현상은 2010년을 전후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울진에서 시작된 고사 현상은 2015년부터 백두대간과 낙동정맥을 따라 강원 삼척과 경북 봉화의 금강소나무 군락으로 확산하는 추세다.

지난해 6월 본지〈임금 관 짜던 금강송이 하얗게 셌다…울진 떼죽음 미스터리〉 보도 이후, 산림청과 녹색연합은 정확한 고사 실태를 파악하기 위해 지난 2월까지 8개월에 걸쳐 울진 금강송 군락지 일대를 조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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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 결과 10그루에서 최대 50그루까지 떼죽음 당한 금강송들이 발견되는 등 고지대를 중심으로 집단 고사 현상이 뚜렷하게 확인됐다. 특히, 최근 들어 고사 범위나 피해 규모가 점차 확대되고 있다.

신재수 센터장은 “금강소나무 고사 현상이 점점 가속화되고 있다는 게 문제”라면서 “전에는 5~10그루 단위로 고사목이 발견되다가 최근에는 20그루 가까이 고사한 형태를 띠고 있고, 작년에는 최대 50그루 정도가 한꺼번에 죽는 경우도 있었다”고 말했다.

“겨울철 기온 상승에 가뭄 겹쳐…수분 부족으로 고사”

고사한 금강소나무. 아래에 시료 채취를 위해 구멍을 뚫은 흔적이 남아 있다. 천권필 기자

고사한 금강소나무. 아래에 시료 채취를 위해 구멍을 뚫은 흔적이 남아 있다. 천권필 기자

산림청은 고사 원인을 밝히기 위해 고사목에 구멍을 뚫어 시료를 채취했다. '소나무계의 에이즈'라고 불리는 소나무재선충병에 걸려 죽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검사 결과 이 일대에서 소나무재선충병에 걸려 죽은 소나무는 단 한 그루도 발견되지 않았다.

이곳에 오래 살았던 주민들은 금강소나무가 떼죽음을 당한 건 따뜻해진 겨울 날씨 때문에 눈이 내리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소광리 주민 한원기(86) 씨는 “전에는 눈이 많이 올 때 120㎝씩 와서 집밖에 나가지도 못했을 정도였는데, 요즘엔 많이 와도 10~15㎝ 정도밖에 오지 않는다”며 “쌓인 눈이 녹아서 땅속으로 물이 들어가 있어야 하는데 산꼭대기는 물이 없다 보니 소나무가 말라 죽는 것”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도 고산지대에 사는 금강소나무의 떼죽음 현상이 기후변화의 영향일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 겨울철 기온이 빠르게 상승하면서 소나무의 호흡량이 증가해 탄수화물 소비가 늘어나는 반면, 가뭄으로 수분 공급량은 부족해지면서 결국 탄수화물·수분 부족으로 죽게 된다는 설명이다.

점점 건조해지는 겨울(경북 울진 겨울철 강수량).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점점 건조해지는 겨울(경북 울진 겨울철 강수량).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기상청에 따르면, 울진 지역의 겨울철 강수량은 1990년대(1991~2000년) 129.5㎜에서 2000년대(2001~2010년) 121.3㎜, 2010년대(2011~2020년) 98.8㎜를 기록하는 등 빠른 속도로 줄고 있다.

특히 수분 스트레스에 취약하고 날씨에 민감한 고지대의 소나무에서 먼저 고사 피해가 나타나는 것도 기후변화의 단서로 여겨지고 있다. 실제로 전체 고사목의 83%가 고도 500m 위에서 발생한 것으로 조사됐다.

서재철 녹색연합 전문위원은 “겨울에 동면하는 활엽수와 달리 칩엽수는 1년 내내 에너지를 공급받아야 하는데 기후변화는 여름철 폭염만 오는 게 아니라 겨울철 고온과 건조 또는 불규칙한 날씨로도 나타난다”며 “겨울에 눈이 내린 뒤에 조금씩 녹으면서 금강소나무에 수분 공급을 해줘야 하는데 그 균형이 깨져버린 것”이라고 설명했다.

금강송 18% 고사 위험 노출돼

경북 울진군 금강송면에 있는 500년 된 금강소나무. 천권필 기자

경북 울진군 금강송면에 있는 500년 된 금강소나무. 천권필 기자

지금 속도대로 온난화가 진행되면 금강소나무 고사 피해가 확산할 뿐 아니라 침엽수림의 생존 자체가 위협받을 수 있다. 국립산림과학원 조사 결과 울진 금강송면 소광리 금강송 숲의 18%가 기후변화로 인한 고사 위험에 노출됐다.

서 전문위원은 “소나무와 잣나무 등 소나무속은 우리나라 전체 산림 면적의 25%가량을 차지한다”며 “소나무를 비롯한 침엽수 전반의 기후변화 영향에 대한 종합적인 적응 대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울진=천권필 기자 feeli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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