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가 준 금귤 벗겨먹는 실수…YS, 설렁탕집 데려가며 자랑

  • 카드 발행 일시2024.05.20

8회. 3김씨도 내 글솜씨를 탐냈다  

2004년 총선에 관여하며 현실 정치를 제대로 경험했지만, 사실 나와 정치의 인연은 198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내 자리라는 게 무척 독특했다. 등단은 늦었지만 ‘경쟁자가 없다’고 할 만큼 빠르게 주목받는 위치로 솟구쳤다고 할까. 글에 논리와 감동 구조, 미학성이 있다는 점을 시장에서 인정받아서인지 정치권이 알아보고 접근해 왔다. 권력자들은 뭔가 문제가 생길 때마다 내게서 말과 글을 빌려가고 싶어 했고, 내가 무언가 이야기해 주기를 바랐다. 자연히 도움을 많이 주게 됐다.

내가 서울에 올라온 것이 1984년이었고, 전두환·노태우·김영삼·김대중 대통령까지는 친분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특별히 한 자리 한 것도, 무슨 그들 덕을 본 것도 없지만 이 세계를 이해하고 예측하는 데 그들이 무엇을 하는가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특히 우리나라는 대통령의 말을 통해 어떻게 세계를 해석할 것인가에 대해 판단하게 되는 경우도 있지 않나.

그 전의 삶은 아주 사적이었다. 어떤 일이든 주관적으로 겪고 받아들이고, 스스로 지적으로 성장하고 확장하는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작가로서 작품을 발표하고 주목받기 시작하면서, 나 역시 세상에 대해 발언하고 제안하고 간섭하고 비평하게 됐다.

노태우 대통령은 대선 공약의 하나였던 중간평가가 골칫거리였다. 그는 1987년 대선(12월 16일) 직전인 12월 12일, 이듬해 서울올림픽이 끝난 다음 국민투표나 국회 표결을 통해 그간의 민주화 이행 실적에 대한 재신임을 묻겠노라고 발표했다. 나중에 중앙일보 보도를 통해 알려졌지만, 6공의 황태자라고 불리던 박철언 정책보좌관은 중간평가를 하지 말자는 입장이었다. 노태우 대통령을 설득해 당시 정국의 주도권을 쥐고 있던 평민당 김대중 총재와 영수회담까지 성사시켜 사실상 중간평가 유보 발표만 남겨둔 상황이었다.

문제는 유보 선언 문안이었다. 노태우 대통령의 유보 선언이 89년 3월 20일이었으니 그 며칠 전이었던 것 같다. 나중에 대전시장을 지낸 염홍철 청와대 정무담당 비서관이 도와달라고 했다. 그는 미국에서 종속이론을 공부하고 돌아와 경남대 교수를 지내다 청와대에 들어간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