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장환 목사(극동방송 이사장)는 2004년 수원중앙침례교회에서 은퇴했다. 40년 동안 담임을 맡았다. 개신교계에는 은퇴 후에 ‘원로목사’ 직함을 갖고서 교회 일에 간섭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전임 목사와 후임 목사 간 갈등의 불씨가 되곤 한다. 김 목사는 그러지 않았다. 대신 극동방송을 키우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은퇴 후 극동방송으로 왔다. 사정은 안 좋았다. 경영은 적자였다. 전기료도 제대로 못 낼 정도였다. 직원 월급을 주는 것도 힘에 부쳤다. 김 목사는 팔을 걷어붙였다. 2005년 1월 8일, 자신이 직접 진행을 맡고 라디오 방송을 시작했다. ‘만나고 싶은 사람, 듣고 싶은 이야기’. 처음에는 “5년만 가도 잘 가는 거야”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출발한 ‘만나고 싶은 사람, 듣고 싶은 이야기’가 지금은 간판 프로그램이 됐다. 다음주(4월 19일)에 1000회를 맞는다. 주 1회, 매주 금요일 오후 1시에 방송이 나간다. 무려 20년 세월이다. 지금껏 단 한 주도 결방이 없었다.
그사이에 극동방송은 흑자로 돌아섰다. 올해 90세인 김 목사는 ‘국내 최고령 라디오 진행자’다. 4일 서울 마포구 상수동 극동방송에서 김장환 목사를 만났다. 그에게 ‘1000회의 소회’를 물었다.
- 20년간 1000회의 방송, 쉽지 않은 일이다.
- “내게는 ‘제2의 목회 인생’이었다. 방송에 초청해 인터뷰를 한 사람만 1000명이 훌쩍 넘는다. 대통령을 지낸 사람부터 유명 연예인, 택시 기사와 이발사, 환경미화원까지 그야말로 천장에서 바닥까지 두루 만났다.”
- 그렇게 만나봤더니 어땠나.
- “모든 사람의 삶에는 어려움이 있더라. 아무리 높고 부유한 사람이라도 외로움이 있더라. 그들의 애환을 들으며 정말 힘든 처지에 있는 사람이 위안을 받기도 한다. 예를 들어 재벌가의 한 사람이 출연한 적이 있다. 재산 때문에 자녀가 싸운다고 했다. 그 이야기 들으며 나부터 이런 생각이 들더라. 나는 재산이 없으니 우리 삼 남매가 싸우지 않는구나. 돈 없는 것도 축복이로구나. 그렇게 느낀 사람이 어디 한둘이었을까.”
- 결국 사람의 이야기가 사람에게 위안을 주는 건가.
- “그렇다. 이웃의 삶을 통해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되더라. 2010년 밴쿠버 동계올림픽 해설위원은 방송에 나와서 아직 결혼을 못 했다고 했다. 그걸 들은 청취자 중 한 분이 자기 딸과 어울리겠다며 소개했다. 결국 결혼했다. 1000회 방송 동안 온갖 일들이 있었다.”
코로나19 사태가 터졌을 때는 난감했다. 비대면 기간이라 게스트를 외부에서 초청할 수가 없었다. 김 목사는 그때 극동방송 직원들을 스튜디오로 불렀다. “목회자 사모인 직원들도 부르고, 쌍둥이 부모인 직원들도 부르고, 갓 입사한 직원도 불렀다. 또 경비 직원과 식당 직원도 불러서 그들의 삶과 애환을 들었다.” 덕분에 코로나 시국에도 결방 없이 흘러올 수 있었다.
- 20년간 방송을 한 번도 쉬지 않았다. 건강하지 않다면 어려운 일 아닌가. 건강 비결은.
- “나는 새벽형 인간이다. 매일 새벽 3시에 일어난다. 극동방송 사무실에는 오전 5시까지 간다. 우선 일간지 신문들을 하나씩 꼼꼼하게 정독한다. 극동방송 직원들을 대상으로 매일 아침 예배도 본다. 가급적 엘리베이터보다 계단을 이용한다. 오래된 습관이다. 늘 바쁘게 돌아다닌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니까. 극동방송은 선교 방송이지 않나. 그러니까 엔도르핀이 솟지. 그게 내 건강의 가장 중요한 비결이다.”
미국에서 가장 큰 개신교단이 침례교다. 교인 수가 5000만 명이 넘는다. 미국 크리스천 셋 중 하나가 침례교인이다. 김 목사는 2000년부터 5년간 세계침례교회연맹 총회장을 역임했다. 그동안 미국인과 유럽인만 세계침례교 총회장을 맡았다. 동양인이 총회장을 맡는 것 자체가 깜짝 놀랄만한 이변이었다.
그는 총회장 취임식을 쿠바의 수도 하바나에서 하자고 했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가 전 세계를 돌면서 선교 활동을 했다. 가보지 못한 도시가 딱 하나 있었다. 그게 쿠바의 하바나였다.” 당시 김 목사는 피델 카스트로 국가평의회 의장도 만났다. 2시간 30분 동안 대담을 했다.
쿠바는 미국의 경제봉쇄 대상국이다. 김 목사는 미국 정부에 쿠바 어린이를 위한 우유와 어린이용 의약품은 경제 봉쇄 대상에서 제외해 달라고 요청했다. 결국 통과됐다. 카스트로는 하바나의 초콜릿 스타디움에서 열린 김 목사의 취임식을 쿠바 전역에 국영 TV로 방송하게 했다.
김 목사는 “귀국했는데 청와대에서 김대중 대통령이 부르더라. 쿠바가 어떠냐고 묻더라. 그때는 한국과 수교가 없었으니까. 현대차가 택시로 돌아다니고, 한국인 2세들이 산다고 했다”고 말했다. 김 목사의 선교 활동이 최근 한국과 쿠바 수교의 거름이 됐음은 물론이다.
극동방송은 기독교 선교방송이다. 해외 50개국에 지사가 있다. 최근에는 북한선교용으로 AM 방송도 갖추려 한다. 한국전쟁 때 미군 하우스 보이로 일했던 김장환 목사는 세계침례교회연맹 총회장이 됐다. 교인 수 12명에 불과하던 수원중앙침례교회는 그가 은퇴할 때 1만5000명 교회가 됐다. 라디오 방송 ‘만나고 싶은 사람, 듣고 싶은 이야기’는 다음 주에 1000회를 맞는다.
김 목사는 이 모두를 관통하는 단어가 하나 있다고 했다. 다름 아닌 ‘복음’이다. 김 목사는 “내게는 첫째도 복음, 둘째도 복음이다”고 말했다. 그의 삶을 송두리째 관통하는 하나의 키워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