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혼자 남아 회고할 줄이야” 3김 마지막 생존자, 김종필 (102)

  • 카드 발행 일시2024.03.22

중앙일보에 ‘김종필 증언록’이 연재 중이던 2015년 11월 22일 김영삼(1927~2015) 전 대통령이 서거했다. JP는 이튿날 자신의 증언록을 YS와의 오랜 인연을 회고하며 명복을 비는 장문의 조사(弔詞)로 갈음했다. 2009년 서거한 김대중 전 대통령에 이어 YS도 세상을 뜨자 JP는 ‘3김 시대’의 마지막 증인이 됐다. 하지만 그 역시 3년 뒤 두 사람을 뒤따르며 그 시대의 문을 닫았다.

2015년 11월 22일 휠체어를 탄 김종필(JP) 전 총리가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 김영삼(YS) 전 대통령의 빈소를 찾아 조문한 뒤 YS의 차남 김현철씨를 위로하고 있다. JP는 “YS도 가고 이제 나 혼자 남았다. 조물주가 나를 이 세상에 남겨놓은 이유는 마무리를 하라는 뜻일 것”이라고 소회를 밝혔다. 중앙포토

2015년 11월 22일 휠체어를 탄 김종필(JP) 전 총리가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 김영삼(YS) 전 대통령의 빈소를 찾아 조문한 뒤 YS의 차남 김현철씨를 위로하고 있다. JP는 “YS도 가고 이제 나 혼자 남았다. 조물주가 나를 이 세상에 남겨놓은 이유는 마무리를 하라는 뜻일 것”이라고 소회를 밝혔다. 중앙포토

김영삼(YS) 전 대통령은 오랜 기간 나와 정치 역정을 같이했다. 그 속에 정치적 애증의 기복(起伏)이 있었다. 어느 때는 동반의 친우였고, 때론 결별의 미움을 격하게 나누기도 했다.

2015년 11월 22일 고인이 된 그와 나는 정치의 출발 배경이 달랐다. 상당 부분 다른 정치행로를 걸었으나 어떤 시대에는 국가 운영의 한 배를 탔으며 정치의 현역을 떠난 뒤엔 우정을 덥혀왔다. 김대중(DJ) 전 대통령에 이어 이제 YS마저 유명(幽明)을 달리했으니 나는 세상이 평하는 소위 3김(金)씨의 마지막 생존자가 됐다. 조물주가 나를 남겨놓은 이유는 마무리를 잘하라는 뜻일 것이다. 그 마무리가 무엇인지는 나도 모른다. 어쩌면 ‘오호(嗚呼)라, 과연 이것이 나 자신이 걸어야 했던 길이냐’는 자탄(自嘆)이 일어날 수도 있고 ‘그래도 미숙하나마 이것으로 만족하라’는 뜻일 수도 있다. 3김 중 나만 혼자 남아 이들의 회고를 남기게 될 줄은 몰랐다. 나는 고인의 영정을 보면서 그런 상념에 잠겼다.

1966년 12월 새해 예산안 처리를 위해 국회 본회의장에 출석한 김종필(JP) 민주공화당 의장(왼쪽)과 김영삼(YS) 민중당 원내총무(오른쪽). JP가 40세, YS가 39세 때의 모습이다. 중앙포토

1966년 12월 새해 예산안 처리를 위해 국회 본회의장에 출석한 김종필(JP) 민주공화당 의장(왼쪽)과 김영삼(YS) 민중당 원내총무(오른쪽). JP가 40세, YS가 39세 때의 모습이다. 중앙포토

내가 고인을 처음 가까이서 본 건 5·16 혁명 이듬해인 1962년이었다. 중앙정보부장이었던 나는 극비리에 신당(민주공화당)을 만드는 일에 매달리고 있었다. 각계각층의 신진 엘리트를 신당에 합류시키고자 했는데 30대의 젊은 정치인 중에서 돋보이는 인물로 YS가 거론됐다. 54년 제3대 총선에서 최연소 국회의원에 당선된 YS는 일찍부터 특출한 야당 정치인으로 각광을 받았다. 그에 대해 많은 곳에서 추천이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