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향해 조명탄 날렸다…‘박정희 양아들’ 만든 사건 셋

  • 카드 발행 일시2024.03.19

<제1부> 궁정동의 총소리  

3회. ‘박정희 양아들’ 전두환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등장하자마자 박정희 대통령의 양아들이란 소문이 나온 것은 그만큼 박정희가 전두환을 총애했기 때문이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전두환은 박정희를 위해 3가지 결정적인 공을 세웠다.

육사생도 5·16 지지 퍼레이드

1961년 5월 18일 오전 서울 태평로. 육군사관학교 생도 800여 명이 5·16을 지지하는 시가행진을 벌이고 있다. 생도들의 오른쪽에 덕수궁 돌담과 대한문의 지붕이 보인다. 몰려나온 시민들 앞엔 계엄군이 착검한 총을 들고 서 있다. 5·16은 육사를 비롯한 3군 사관생도들의 거사 지지로 성공 단계에 접어들었다. 사진 국가기록원

1961년 5월 18일 오전 서울 태평로. 육군사관학교 생도 800여 명이 5·16을 지지하는 시가행진을 벌이고 있다. 생도들의 오른쪽에 덕수궁 돌담과 대한문의 지붕이 보인다. 몰려나온 시민들 앞엔 계엄군이 착검한 총을 들고 서 있다. 5·16은 육사를 비롯한 3군 사관생도들의 거사 지지로 성공 단계에 접어들었다. 사진 국가기록원

첫 번째는 5·16 직후 육사생도들을 동원해 쿠데타 지지 시가행진을 벌인 공이다.
1961년 5월 16일 새벽 박정희 소장과 쿠데타군은 성공적으로 서울 시내로 진입, KBS 라디오를 통해 ‘혁명 성공’을 선포하고 육군본부에 군사혁명위원회까지 차렸다. 그러나 사실은 매우 불안한 상황이었다. 당시 군부 사정으로 보자면 5·16은 일부 불만세력이 일으킨 도발이었다.

당시 참모총장 장도영 중장은 박정희 소장으로부터 ‘지도자로 모시겠다’는 제안을 받고서 거부했다. 거꾸로 “이만하면 됐으니 복귀하라”고 명령했다. 서울·경기 일대 실병력을 보유한 이한림 1군 사령관은 “쿠데타를 진압하겠다”고 선언했다. 윤보선 대통령은 “계엄을 인정할 수 없다”며 반대했고, 장면 총리는 행방불명이었다.
결정적으로 주한미군 매그루더 사령관은 “미군이 보유한 작전지휘권 침해”라며 ‘쿠데타 무효’를 선언했다.

쿠데타가 흔들리는 긴박한 상황에서 5·16 주체세력들은 지지여론 조성을 위해 육사생도들을 동원해 시가행진을 벌이고자 했다. 실제로 일부 대령이 생도들을 동원하고자 육사로 찾아갔다. 그러나 육사교장 강영훈이 “생도들을 정치도구로 이용하면 안 된다”며 가로막는 바람에 실패했다.

이때 전두환 대위가 등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