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를 여는 새해가 밝았다. 사회는 겉으로는 안정을 되찾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정치권은 정치의 해빙기를 맞아 한껏 들뜬 분위기였다. 한쪽에서는 ‘민주화의 여명’이 밝아 온다고 하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안개 정국’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나는 신년을 맞아 휘호를 썼다. 流水不爭先(유수부쟁선). 흐르는 물은 앞을 다투지 않는다는 뜻이다. 과욕을 부리며 앞을 다투기보다는 순리(順理)에 따라 세상사를 처리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았다. 권력의 향방이 오리무중(五里霧中)이었던 때다. 이는 달리 말하자면 누구에게나 집권의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정치권에선 정국의 주도권을 잡기 위한 물밑 다툼이 시작되고 있었다.
나는 총재로서 주저앉은 민주공화당을 일으켜 세우기에 바빴다.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한 뒤 공화당은 난파선 신세였다. 최규하 과도 정부가 들어서자 공화당은 더 이상 집권 여당이 아닌 원내 다수당일 뿐이었다. 63년 창당 이후 공화당이 이룩한 근대화의 공적은 인정받지 못하는 대신 유신 독재의 도구라는 비난을 받기 일쑤였다. 그런 공격에 제대로 반박하지도 못하고 죄인이 된 것처럼 주눅이 들어 있었다. ‘요즘 공화당은 사기가 죽어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다’는 조롱마저 내 귀에 들려왔다. 나는 조직을 다독이면서 차근차근 추슬러 나가야 했다. 나는 신년사에서 “새 시대에 맞춰 당이 새 옷을 입고 새 마음으로 새 길을 열어야 합니다. 가슴을 활짝 열어 온 국민의 소리를 제대로 듣고 정도(正道)를 단단히 열어가면서 다시금 국민의 신임을 호소하고자 합니다”고 말했다.
김영삼(YS) 총재는 자신이 10·26을 촉발시킨 장본인이라며 마치 승리자가 된 듯 앞장서 갔다. 79년 말 가택연금에서 풀려난 김대중(DJ) 역시 재야를 기반으로 세를 키워 나갔다. 과도기의 심판을 맡겠다던 최규하 대통령도 신현확 총리가 옆에서 군불을 때자 초심과 멀어져 갔다. 12·12 쿠데타로 군권을 장악한 전두환의 신군부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