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생각해도 참 당돌했어.” JP가 정군(整軍)에서 5·16에 이르는 긴박했던 순간을 회상하면서 떠올린 말이다. 그 대담함은 박정희와 ‘지프의 혁명언약’으로 발전한다.
」4·19혁명 10주년, 나는 학생들의 의거를 생각하며 시를 썼다. 1970년 그때 나는 공화당 의장을 비롯한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 있었다. “역류에 숨 막히고/분노가 꽃 피던 날/해일같이 넘쳐 온 함성들이/선지빛 산화(散華)로 흩날려/조국의 사월 청정한 넋돌되어 솟아난다….” 1960년 4·19 때 나는 서른네 살 육군 중령이었다. 나 역시 4·19 정신에 공감하고 있었다.
4·19의 반독재, 반부패 외침은 장면 정부의 무능한 리더십 때문에 꽃을 피우지 못했다. 그러나 젊음의 희생은 우리나라를 결정적으로 바꿔낸 전환적 에너지였다. 군대 내부도 그런 물결이 꿈틀거렸다.
전국 5대 도시에 비상계엄이 실시되자 장교들은 집에 못 들어가고 영내 대기할 때가 많았다. 육본 정보참모본부 기획관리과장이었던 나의 사무실은 영관급 장교들의 ‘시국 토론장’이 됐다. 중견 장교들의 논의는 3·15 부정선거를 주도한 군 수뇌부들이 퇴진해야 한다는 쪽으로 모아졌다. 5·16 거사까지 1년 새 육군 참모총장 4명이 바뀌고 10여 명의 장성이 퇴진한 정군운동은 이런 분위기에서 시작됐다. 정군운동의 주동자는 나를 비롯해 석정선(훗날 정보부 차장보), 김형욱(중앙정보부장), 길재호(공화당 사무총장) 등 육사 8기 동기생 8명이었다.
우리들의 정군운동에 불을 붙인 사람은 박정희 소장이었다. 그는 당시 부산지구 계엄사령관(군수기지사령관)이었다. 5월 2일, 박 장군은 부관인 손영길 대위(육사 11기)를 L-19 경비행기로 서울로 보내 송요찬 참모총장에게 편지를 전달했다.
다음은 박정희 소장의 편지 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