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네 하려는 거, 그거 하자”…박정희와 ‘지프차 혁명언약’ (6)

  • 카드 발행 일시2023.07.21

“지금 생각해도 참 당돌했어.” JP가 정군(整軍)에서 5·16에 이르는 긴박했던 순간을 회상하면서 떠올린 말이다. 그 대담함은 박정희와 ‘지프의 혁명언약’으로 발전한다.

4·19혁명 10주년, 나는 학생들의 의거를 생각하며 시를 썼다. 1970년 그때 나는 공화당 의장을 비롯한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 있었다. “역류에 숨 막히고/분노가 꽃 피던 날/해일같이 넘쳐 온 함성들이/선지빛 산화(散華)로 흩날려/조국의 사월 청정한 넋돌되어 솟아난다….” 1960년 4·19 때 나는 서른네 살 육군 중령이었다. 나 역시 4·19 정신에 공감하고 있었다.

4·19의 반독재, 반부패 외침은 장면 정부의 무능한 리더십 때문에 꽃을 피우지 못했다. 그러나 젊음의 희생은 우리나라를 결정적으로 바꿔낸 전환적 에너지였다. 군대 내부도 그런 물결이 꿈틀거렸다.

장면 전 총리. 중앙포토

장면 전 총리. 중앙포토

전국 5대 도시에 비상계엄이 실시되자 장교들은 집에 못 들어가고 영내 대기할 때가 많았다. 육본 정보참모본부 기획관리과장이었던 나의 사무실은 영관급 장교들의 ‘시국 토론장’이 됐다. 중견 장교들의 논의는 3·15 부정선거를 주도한 군 수뇌부들이 퇴진해야 한다는 쪽으로 모아졌다. 5·16 거사까지 1년 새 육군 참모총장 4명이 바뀌고 10여 명의 장성이 퇴진한 정군운동은 이런 분위기에서 시작됐다. 정군운동의 주동자는 나를 비롯해 석정선(훗날 정보부 차장보), 김형욱(중앙정보부장), 길재호(공화당 사무총장) 등 육사 8기 동기생 8명이었다.

우리들의 정군운동에 불을 붙인 사람은 박정희 소장이었다. 그는 당시 부산지구 계엄사령관(군수기지사령관)이었다. 5월 2일, 박 장군은 부관인 손영길 대위(육사 11기)를 L-19 경비행기로 서울로 보내 송요찬 참모총장에게 편지를 전달했다.

1961년 8월 진해 해군통제본부 공관에서 열린 군·정부 관계자 세미나에 참석한 김종필 중정 부장(왼쪽 둘째). 맨 왼쪽 선글라스 낀 사람이 송요찬 내각수반. 중앙포토

1961년 8월 진해 해군통제본부 공관에서 열린 군·정부 관계자 세미나에 참석한 김종필 중정 부장(왼쪽 둘째). 맨 왼쪽 선글라스 낀 사람이 송요찬 내각수반. 중앙포토

다음은 박정희 소장의 편지 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