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1년 5·16을 거사할 때 김종필의 신분은 민간인이었다. 그는 3개월 전 군에서 쫓겨났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석 달이었다. 얼마 동안 혁명 계획을 세웠는지에 많은 질문이 쏟아져왔다. 3개월이라고 대답하면 놀랄 것이다. 세 달 준비하고 세상을 평정했다니-. 그것은 사실이다. 본격적인 거사 도모 기간은 87일이었다. 물론 혁명 얘기는 그 전에도 나눴다. 그때는 묵시적인 의견교환이었다. 난마처럼 엉망진창인 시국에 대한 분노와 애국의 충정을 모으는 수준이었다. 1961년 2월 19일. 박정희 소장과 혁명을 일으키기로 합의하고 실행에 옮긴 시점이다. 나는 강제 예편돼 민간인 신분이었고, 박 소장은 대구 2군 부사령관으로 있었다. 육본 작전참모부장으로 있다 그리로 옮겼으니 좌천이었다. 우리는 그날 대구에서 만나 혁명을 결의했다. 그해 2월 4일부터 15일까지 나는 헌병대 감방에 있었다. 그 전해, 그러니까 60년 9월 이래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이른바 ‘16인 하극상 사건의 배후 조종자’로 지목돼 육사 동기생 석정선과 함께 구속됐다. 난로 없는 감방, 영하 10도의 한파를 모포 두 장으로 버텼다.
4·19혁명 직후 나는 군 수뇌부의 부정·부패·무능의 문제를 제기하면서 3성 이상 장군들의 퇴진을 요구하는 정군(整軍)운동을 주동했다.
남들은 하극상(下克上)이라고 부르지만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미 시대의 흐름에 올라타 있었다. 아랫사람이 위를 누르는 하극상이 아니라 내가 몸담은 군 조직을 온전하게 만드는 정군이었다. 군대만 제대로 서 있다면 대한민국은 버틸 수 있다. 정치가 아무리 썩고 못마땅해도 군이 굳건하다면 문제는 시간이 해결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별 두세 개짜리 수뇌부들은 나를 그냥 군에서 쫓아내려 했다. 아마 ‘저 건방진 자식, 중령 놈이 뭘 안다고 날뛰는 거야, 이번 기회에 날려 버려야지’라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감방에 갇힌 뒤 열흘쯤 있는데 헌병감 조흥만 준장이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