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시간 만에 돌아온 박정희…JP “휴, 빨갱이 아니었구먼” (3)

  • 카드 발행 일시2023.07.12

박정희에겐 좌익이란 꼬리표가 따라다녔다. JP는 6·25 개전 초기 박정희가 좌익이 아니라는 확실한 증거를 갖게 됐다. JP가 확보한 흔들리지 않는 증거는 무엇일까.

1950년 6월 25일 새벽 김일성의 기습적인 남침이 시작됐다. 나는 당시 육군본부 정보국 전투정보과 북한반장(중위)이었다. 며칠 전부터 휴전선 쪽 적정(敵情)이 크게 불안했다. 6월 24일 밤 나는 정보국 당직을 자처했다. 밤새 뜬눈으로 전쟁을 맞았다.

대비 없이 맞은 전쟁이었다. 하지만 오판은 우리가 했다. 육군 정보국은 적의 동향을 정확하게 예측했다. 정보국 작전정보실장인 박정희와 우리 전투정보과는 적정 보고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군과 정부의 수뇌들은 이를 불신했고 활용할 줄 몰랐다. 우리는 적을 알고서도 당한 것이다. 27일 밤 적의 탱크가 서울 미아리에 출몰하고 있었다. 상황이 다급해졌다. 육군본부는 그날 경기도 시흥으로 옮겼다가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나는 적정을 파악하느라 주위를 돌아볼 틈 없이 바빴다. 28일 자정을 넘긴 새벽, 지하 벙커에서 일하다 나와 보니 상황장교와 사병 몇 명만이 보였다. 육본 수뇌부는 임시본부가 차려질 수원을 향해 이미 출발한 상태였다. 병기감실 앞에 GMC 트럭이 보였다. 차에 올라 키를 꽂아 보니 시동이 걸렸다.

나는 그 트럭을 몰아 육사 8기생인 동기 몇 명을 태우고 길을 나섰다. 새벽 2시30분쯤이었다. 한강 인도교(지금의 한강대교)를 200m쯤 남겨둔 지점이었다. 그때 앞에서 번쩍하더니 큰 폭발음이 일었다. 한강 인도교에는 피란을 가려는 사람들이 가득 몰려 있었다. 국군이 후퇴하면서 인도교를 폭파한 것이다. 무엇인가가 후두둑 떨어져 내 얼굴에 묻었다. 사람들의 피와 살점이었다. 내가 몰던 차가 조금만 일찍 인도교에 진입했으면 어떻게 됐을까. 등에 식은 땀이 났다. 우리는 차를 버리고 서빙고 나루를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