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한 여자” “미친 사나이”…‘강남스타일’ 오빤 틀렸다

  • 카드 발행 일시2022.11.30
  • 관심사쉴 땐 뭐하지

싸이 뮤직비디오 ‘강남스타일’은 글로벌 히트상품이다. 2012년 7월에 나와 지금까지 세계인 42억 명이 봤다. 야한 노랫말과 노골적 춤을 거북스러워하는 이들도 있지만 세계가 열광했다. 노래 하나가 서울 특히 강남을 세계에 알렸으니 효자도 이런 효자가 없다. 이 덕분에 한국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외국인들도 강남을 아는 척한다. 1980년대까지는 강북이 청춘 놀이터였다. 이제 누가 뭐래도 강남은 청춘 문화의 중심지가 됐다.

그동안 젊은이들의 패션은 어떻게 변해 왔을까.

서울 첫 양복점은 1889년 세종로 광화문우체국 옆에서 문을 연 ‘하마다 양복점’이다(서울역사편찬원 2016). 일제강점기만 해도 양장은 일부 특권층이나 입었다. 광복 뒤 미군정이 들어서며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했다. 하지만 서민들은 쳐다볼 수 없었다. 1949년 5급 공무원 월급이 1만8000원, 대통령은 15만원이었다. 양복 한 벌이 1만8000원에서 5만원이고 맞춤복은 12만원이었단다(현대패션 100년 편찬위원회. 2002). 옷감은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오거나 밀수품이 대다수였다. 특히 마카오에서 들어온 영국산 직물이 최고급품 대접을 받아 이를 입은 사람을 ‘마카오신사’라 불렀다(서울역사편찬원 2016).

물자 부족에 시달리던 한국전쟁기에는 사치품 소비를 제한했다. 외국산 모자·핸드백·화장품·주류·담배 등의 수입과 판매를 금지했다. 14K 이상의 귀금속과 옷감도 마찬가지였다(1952년 전시생활개선법 시행령).

1960년대는 경제가 발전하며 여유가 생기고, 여성의 사회 진출이 늘며 자신을 표현하려는 욕구도 커졌다. 양장이 일상복이 된 시기이기도 하다. 1967년 1월 가수 윤복희가 미국에서 귀국하며 입었다고 알려진 미니스커트는 핵폭탄급 패션으로 사회에 충격파를 던졌다. TV는 유행 정보를 퍼 나르는 매개가 됐다(KBS 1961년 개국, TBC 1964년 개국, MBC 1969년 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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