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내비게이션] 103년 만에…독립운동가 최재형 부부의 감동적 '해후'
안녕하세요. 중앙일보 프리미엄 디지털 서비스 구독자 여러분. 매주 월, 수요일 아침 뉴스 내비게이션 레터 서비스를 통해 주요 시사 현안을 정리해 드리고 있습니다. 오늘은 독립운동가 최재형(1860-1920) 선생과 부인 최 엘라네 페트로브나(1879-1952) 부부에 얽힌 사연, 103년 만에 국립서울현충원에 합장된 배경을 살펴봤습니다.
103년 만에…독립운동가 최재형 부부의 감동적 '해후'
독립운동가 최재형 선생과 부인 최 엘레나 페트로브나. [국가보훈부]
8·15 광복절을 하루 앞둔 오늘(14일) 오전 10시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운동가 묘역 108번 자리에서 무려 103년 만에 해후(邂逅)하는 부부가 있다.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로 불리는 최재형(1860~1920) 선생과 부인 최 엘레나 페트로브나(1879~1952) 여사가 주인공이다.
두 사람의 인생 역정은 외세의 침략으로 나라를 잃은 구한말과 일제 식민지 시대의 비극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 함경북도 경원 출생인 최 선생은 굶주림과 수탈을 피해 부모를 따라 연해주로 이주했다. 하와이보다 앞선 이민 1세대였다. 가출한 최 선생은 러시아 선장 부부에게 입양됐고 배를 타고 6년에 걸쳐 두 번 해외를 일주했다. 그 경험으로 성인이 되면서 군납 사업을 벌여 막대한 부를 일궜다.
자수성가한 사업가로서 충분히 호의호식하며 편하게 살 수도 있었지만, 그는 고생스러워도 더 뜻있는 인생을 선택했다. 만주를 거쳐 연해주로 이주한 동포들을 위해 학교를 수십 개 설립하고 '대동공보'를 발행해 항일 의식을 고취했다. 최 선생은 안중근(1879~1910) 의사 등과 함께 1908년 항일조직 동의회(同義會)를 설립했다. 안 의사가 1909년 10월 26일 만주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저격한 권총을 지원하는 등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1919년 4월 11일 상하이에서 출범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초대 재무총장으로 참여했다.
하지만 항일 운동의 근거지였던 연해주를 공격한 일본 군대에 의해 최 선생은 1920년 4월 7일 총살됐다. 일제는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숨긴 것처럼 최 선생의 유해를 감췄다. 103년이 지난 지금도 찾지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