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하는 사람들은 국태민안(國泰民安)을 최고로 치고 국리민복(國利民福)을 추구해야 한다. 그게 국가 운영의 원칙이며 내가 3당 합당을 결행한 것도 그런 생각 때문이었다.
1990년 1월 22일 노태우·김영삼(YS)과 나는 “당파적 이해(利害)로 분열·대결하는 정치에 종지부를 찍겠다”고 선언하고 민주자유당을 창당했다. 하지만 당파적 분열은 쉽게 해소될 사안이 아니었다. 한 지붕 세 가족이란 말이 실감될 정도로 서로 의심하고 견제했다. YS의 민주계(통일민주당)는 이질적으로 자리했다.
우리(신민주공화계)와 민정계(노태우 대통령계)가 산업화 세력을 대표했다면 민주계는 민주화 세력의 한 축을 담당했다. YS는 차기 대권 문제로 DJ와 갈라섰지만 민주계 의원들은 야성(野性)의 정치를 해온 이력과 체질 면에서 오히려 평민당(평화민주당) 쪽과 가까웠다.
첫 충돌은 민주계의 김영삼 최고위원(5월 9일 창당 전당대회 이후 대표최고위원으로 바뀜)과 민정계의 박철언 정무장관 사이에서 일어났다. 90년 3월 하순 YS가 소련을 방문할 때였다. 노 대통령은 박철언 장관한테 미하일 고르바초프 대통령에게 보내는 자신의 친서를 맡기며 YS의 방소(訪蘇)를 돕도록 했다. 그러나 박 장관은 “나는 YS를 수행(隨行)하는 것이 아니다. 동행(同行)으로 봐달라”고 주장하며 출발 때부터 잡음을 일으켰다.
YS는 모스크바 크렘린궁에서 고르바초프 대통령을 잠깐 만날 때 무엇이 그리 급했던지 노 대통령의 친서를 휴대한 박 장관을 데려가지 않았다. 고르바초프를 만난 뒤엔 “다 끝났다. 한반도에 전쟁은 없다”는 과장된 표현을 사용해 외교적으로 물의를 일으켰다. 수행이니 동행이니 하는 말장난이나 소련 방문 중 YS와 박철언이 벌인 경쟁적 행각은 낯 뜨거운 장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