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 태어난 성지 중의 성지 '룸비니'…한국 범종 울리는 까닭 [백성호의 현문우답]
오피니언 백성호의 현문우답

부처 태어난 성지 중의 성지 '룸비니'…한국 범종 울리는 까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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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백성호 기자 중앙일보 종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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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호 종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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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의 룸비니는 불교의 성지 중 성지다. 2600년 전 부처님이 이곳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지금도 지구촌에서 순례객들이 끊임없이 찾는 곳이다. 룸비니 동산의 땅은 한정돼 있다. 세계 각국이 이곳에 자국의 건축물을 세우려는 경쟁이 치열하다. 쉽진 않다. 네팔 정부의 허락을 받는 일이 ‘하늘의 별따기 ’이기 때문이다.

지난달 28일 룸비니 동산에서 한국의 전통 누각 낙성식과 범종 타종식이 열렸다. 부처님 탄생지인 마야 데비 사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기와를 얹은 한국의 누각과 범종이 세워졌다. 네팔 정부에서 선묵 혜자 스님에게 2000평이나 되는 땅을 선뜻 내주었기 때문이다. 이유가 있다.

지난달 28일 네팔의 부처님 탄생지인 룸비니에서 평화의 종 타종식이 열렸다. 왼쪽부터 네팔 수단 키라티 문화관광부 장관, 헤자 스님, 동광 스님. 네팔(룸비니)=백성호 기자

지난달 28일 네팔의 부처님 탄생지인 룸비니에서 평화의 종 타종식이 열렸다. 왼쪽부터 네팔 수단 키라티 문화관광부 장관, 헤자 스님, 동광 스님. 네팔(룸비니)=백성호 기자

2008년 네팔은 마오 반군으로 인해 몸살을 앓고 있었다. 관광객이나 등산객들도 네팔 방문을 꺼릴 정도였다. 관광 산업 의존도가 높은 네팔 정부로선 난감한 상황이었다. 당시 혜자 스님은 순례객 300명을 이끌고 전세기를 타고 네팔로 룸비니 순례를 왔다. 네팔 정부로선 혜자 스님이 이끄는 ‘108산사순례기도회’가 그지없이 고마울 따름이었다.

그뿐만 아니다. 순례단이 네팔에 머무는 1주일간 네팔 정부와 반군 사이에 평화 휴전 협정이 맺어졌다. 혜자 스님의 순례단이 결정적 계기였다. 이후 네팔에는 장기적 평화가 찾아왔다. 네팔 정부는 그때의 고마움을 내내 잊지 못했다. 그리고 네팔 총리는 혜자 스님에게 룸비니 동산에 있는 땅 2000평을 통 크게 기증했다.

땅의 위치도 알짜배기다. 부처님이 태어난 마야 데비 사원과 아소카 석주가 있는 곳이 룸비니의 핵심이다. 여길 기점으로 동산의 중심을 가르는 길이 나 있다. 혜자 스님이 받은 땅은 그 길의 가운데 있다. 그러니 룸비니 동산 마스터 플랜의 핵심 지역에 해당한다.

혜자 스님은 이곳을 한국적 정서와 문화로 꾸미고 있다. 아소카 석주를 닮은 석주에 한국적 양식의 탄생불을 세웠다. 탄생불의 발바닥에는 인도의 쿠시나가르(부처님 열반지)에서 받은 사리가 들어 있다. 그리고 이번에는 한국의 기와 누각과 전통 양식의 범종을 설치했다.

네팔 정부로부터 혜자 스님이 기증받은 2000평 부지에 한국 전통 양식의 종각과 범종이 설치됐다. 낙성식과 타종식이 열리고 있다. 네팔(룸비니)=백성호 기자

네팔 정부로부터 혜자 스님이 기증받은 2000평 부지에 한국 전통 양식의 종각과 범종이 설치됐다. 낙성식과 타종식이 열리고 있다. 네팔(룸비니)=백성호 기자

사실 룸비니는 평화의 땅이다. 갓 태어난 아기 붓다가 일곱 걸음을 뗀 뒤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이라고 외쳤다는 전승이 있다. 물론 막 태어난 아기가 걸음을 걷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초기 불교 경전에도 그런 기록은 없다. 대신 여기에는 불교의 본질을 드러내는 상징적 메시지가 담겨 있다.

우리말로 풀면 “하늘 위, 하늘 아래 오직 나만이 존귀하다”가 된다. 그런데 붓다가 “이 우주에서 내가 최고야”라고 말하는 게 아니다. 그건 불교에 대한 얕은 이해에서 비롯되는 큰 오해다. 붓다가 말하는 유아(唯訝)는 무아(無我)를 통과한 뒤 드러나는 대아(大我)를 일컫는다. ‘작은 나’가 아니라 나와 너, 그리고 우주를 포괄하는 ‘큰 나’다. 그러니 “오직 나만이 존귀하다”는 “우리가 모두 존귀하다”는 뜻이 된다. 너와 내가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불이(不二)의 안목이 아기 붓다의 선언에 오롯이 담겨 있다.

그래서 룸비니는 평화의 땅이다. 나와 이웃, 나와 세상을 둘로 보지 않는 평화의 정신이 깃들어 있는 곳이다. 혜자 스님은 이곳에 평화의 종을 세웠다. 이날 종각 낙성식과 범종 타종식에는 ‘108산사순례기도회’ 회원 160명이 참석했다. 네팔의 수단 키라티 문화관광부 장관도 카트만두에서 와 낙성식장을 찾았다.

선묵 혜자 스님이 이끄는 '109산사순례기도회' 회원들이 룸비니에서 세계 평화를 기원하고 있다. 네팔(룸비니)=백성호 기자

선묵 혜자 스님이 이끄는 '109산사순례기도회' 회원들이 룸비니에서 세계 평화를 기원하고 있다. 네팔(룸비니)=백성호 기자

키라티 장관은 “네팔 사람들은 꿈에 우유나 물을 보면 좋은 소식이 있을 거라 여긴다. 며칠 전부터 제가 우유가 보이는 꿈을 계속 꾸고 있다. 한국에서는 돼지가 나오면 좋은 꿈이라고 들었다. 내가 왜 자꾸 좋은 꿈을 꿀까 곰곰이 생각했다”며 “네팔에서는 사람들을 깨닫게 할 때 종소리를 사용한다. 한국에서 만든 범종 소리를 통해 부처님 말씀이 전해지고, 그 소리를 들은 더 많은 사람이 깨닫게 되길 바란다.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있겠는가”라며 꿈에 대한 해석을 내놓았다.

룸비니에 조성한 범종은 무게가 1.5t이다. 충북 진천에서 장인이 만들었다. 진천에서 부산항, 다시 배에 싣고 싱가포르를 거쳐 인도 콜카타로 왔다. 콜카타에서 트럭에 싣고 육로로 네팔 룸비니로 오는 데만 꼬박 5일, 총 53일이 걸렸다.

이날 타종식에는 교복을 입은 네팔 학생들도 보였다. 혜자 스님이 네팔에 세운 선혜학교의 학생들이다. 하루 전날 혜자 스님은 선혜학교를 찾아 체육복과 가방, 학용품 등을 기증했다. 혜자 스님은 학생들의 손을 잡고 함께 범종을 울렸다. “더~어어엉!”하는 특유의 한국 범종 소리가 룸비니 동산에 울려 퍼졌다.

네팔 룸비니의 선혜학교를 찾은 혜자 스님과 108산사순례기도회 회원들이 학생들에게 체육복과 가방, 학용품 등을 나누어 주고 있다. 룸비니(네팔)=백성호 기자

네팔 룸비니의 선혜학교를 찾은 혜자 스님과 108산사순례기도회 회원들이 학생들에게 체육복과 가방, 학용품 등을 나누어 주고 있다. 룸비니(네팔)=백성호 기자

선묵 혜자 스님은 "룸비니 동산을 찾는 누구나 한국 전통 양식의 범종인 평화의 종을 울릴 수 있다"고 말했다. 네팔(룸비니)=백성호 기자

선묵 혜자 스님은 "룸비니 동산을 찾는 누구나 한국 전통 양식의 범종인 평화의 종을 울릴 수 있다"고 말했다. 네팔(룸비니)=백성호 기자

혜자 스님은 “룸비니 동산을 찾는 누구나 이 전각에 올라와서 범종을 칠 수 있도록 했다. 세계 각국에서 온 순례객들이 다들 경험할 수 있다”며 “이 범종 소리가 룸비니에 울릴 때마다 부처님의 깨달음, 평화의 메시지가 더 많은 사람의 가슴에 가닿길 염원한다”고 말했다.

 ◇108산사순례기도회=혜자 스님이 2006년부터 시작한 산사 순례단. 9년간 이어졌다. 매달 1회 5000명의 회원이 버스를 타고 108개 산사를 순례했다. 버스 50대가 줄지어 고속도로를 달리는 풍경은 장관이었다. 총 이동 거리 817만㎞. 지구를 204바퀴 돌고, 달까지 11회 왕복할 수 있는 거리다. 동원된 버스만 해도 1만1664대. 한국 불교사에 기록될만한 순례 기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