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7월 30일, 스물셋 딸은 음주 운전자가 낸 7중 추돌사고로 몸 절반 이상에 중화상을 입었다. 사고 뒤 혼자선 밥을 먹지도, 화장실을 가지도 못하는 딸을 보살피던 부부가 절망을 뚫고 했던 기도는 "아기 지선이를 다시 키울 수 있어 감사하다"였다. 이지선(45) 이화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의 부모 이병천(76)씨와 심정(71)씨 이야기다. 사고 당시 딸의 나이였던 23년의 세월이 한 번 더 흘렀다. 두 사람은 "딸의 고백처럼 우리도 사고와 잘 헤어졌다"고 말했다. 지난달 21일 이화여대에서 오랜 여행을 앞둔 두 사람을 만났다. 교수 연구실에 들어서자, 이 교수가 어머니 심씨에게 직접 화장을 해주고 있었다. 그는 "엄마, 오늘 화장 잘 됐다"며 웃었다.
세 사람은 지난 3월 이 교수가 모교 이화여대에 부임하면서 19년 만에 함께 살고 있다. 이 교수는 2004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보스턴대·컬럼비아대·UCLA에서 공부한 뒤 2017년부터 6년간 포항 한동대에서 교수 생활을 했다. 최근엔 주말 저녁마다 오빠 정근(48)씨의 다섯 가족까지 모두 모여 식사를 한다.
- 지금도 사고 얘기를 꺼내는 건 쉽지 않을 것 같다.
- 사고 이야기를 안 한 지 오래됐다. 숨기거나 잊으려 한 건 아니고, 자주 웃고 가끔은 서로 흉도 보는 보통의 가족으로 살고 있다. 분하고 억울한 걸로 치면 지구를 몇 바퀴 돌아야 하겠지만, 사고가 우리만 비껴가라는 법도 없지 않나.
- 사고 뒤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은.
- 아침에 서로 눈을 맞추는 것만으로도 감사한다.
사고 당일 이 교수는 도서관에서 공부하다가 오빠와 소형차를 타고 귀가하던 중 만취한 운전자가 몬 중형차에 들이받혔다. 차가 불길에 휩싸였고 오빠는 팔이 타는 와중에도 동생을 불 속에서 꺼냈다. 곧바로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몸 55%에 3도 화상을 입었다. 심씨는 응급실에서 목도한 새까맣게 타버린 딸의 얼굴과 침대에 흥건한 피와 진물, 탄 냄새에 충격을 받았다. 딸을 안으려다가 어찌할지 몰라 뒤로 물러섰을 정도다. 이후 딸은 7개월간 병원 생활을 하며 큰 수술을 받았고 퇴원 뒤에도 40번 넘는 피부 이식 수술을 받았다.
무너진 가족을 일으킨 건 딸을 향한 부모의 정성이었다. 심씨는 하루 세 번 20분씩 면회가 허용되는 화상 중환자실에서 딸에게 밥 먹이는 일에 집중했다. 한 숟가락씩 입에 넣을 때마다 "이 밥이 피가, 살이, 가죽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딸의 얼굴과 손이 사고 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혈당이 떨어져 수혈해야 했을 때도 부모는 묵묵히 밥을 먹이고 몸을 닦고 병원 밖 이야기를 들려줬다. 부모의 덤덤함 눈빛을 보고 딸은 조금씩 안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정작 심씨는 면회 뒤 문밖을 나서면 쓰러지곤 했다. 딸을 간호하면서 체중이 10kg 가까이 빠졌다고 한다.
- 하루에 한 가지씩 감사할 거리를 찾자는 건 어떤 얘기인가.
- 병원 생활 5개월쯤 됐을 때, 의약분업 의료파업 때문에 수술을 못 받고 진통제만으로 버틸 때였다. 아침에 딸의 안대를 벗기면 얼굴에서 나온 진물이 가득 고여있었다. 미칠 것 같은 심정이었다. 그런데 절망의 나락 끝에서 감사할 것을 찾아야겠단 생각이 들더라.
- 어떤 걸 감사했나.
- 찾아보니 많았다. 그해 크리스마스에 딸과 병원 마당에 내린 눈을 밟았다. '뽀드득' 소리에 감사해 했던 기억이 난다.
- 딸처럼 가해자를 용서했나.
- 그렇다. 딸이 위중할 땐 가해자를 따질 겨를이 없었다. 나중에 그가 보험료를 미납한 상태였는데, 사고 뒤 완납했다고 들었다. 생활이 어려운 사람이었다. 가해자를 생각나지 않게 해주신 건 신의 은혜다.
부모의 강인함은 딸의 삶에 긍정의 씨앗으로 심겼다. 이 교수는 "남은 평생을 피해자로만 살지 않을 수 있던 건 부모님 덕분"이라고 말했다. 두 사람은 "한 번도 불쌍하다거나 안 됐다고 하지 않았다"며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딸로 전과 똑같이 대했다"고 말했다. 심씨는 사고 전에도 제대로 연애를 해본 적 없는 딸에게 "사고 안 났어도 시집 못 갔을 거"라고 농담을 하고, 이 교수는 "고마워 엄마"라고 받아치기도 한다고 한다.
말수가 적고 감정 표현도 거의 없는 아버지였던 이씨는 병원 생활을 하며 딸과 친해졌다. 딸은 짧은 면회 시간에 다른 환자들과 인사를 다 하고 올 정도로 느긋한 그에게 '거북이'란 별명을 지어줬다. 말을 잘못 알아듣는 일이 많아 '주한 외국인'이라고 놀리기도 했다.
두 사람은 딸에게 하고 싶은 말을 묻자 "씩씩하게 살아줘서 고맙다"고 답했다. 이어 "살아나느라고 남들보다 고생했는데 너무 애쓰면서 살 필요 없다, 그냥 지금처럼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자는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