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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나 쳐먹어라" 장관에 똥물 퍼부었다…김두한의 마지막 칼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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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문화의 기록장 ‘종로 모던’] 장군의 아들 ②

불쑥 찾아온 해방, 그리고 소련군과 미군의 분단점령과 전쟁으로 이어지는 칼바람 부는 세월. 온전한 정신으로 못살 판, 풍류 바람을 타고 한바탕 칼춤이라도 춰야 할 상황이었다. 타락한 시대 타락한 방법으로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소설(小說)이라고 게오르그 루카치는 말한다. 북방에서 밀고 오는 공산주의와 남방에서 밀려 들어오는 자유민주주의의 바람이 협공을 하니 죽을 판이다, 소설가 김동리는 “좌우간의 좌우”를 논하며 다음의 말을 한다.

1966년 9월 22일 ‘국회 오물투척 사건’ 현장. 신문지로 포장한 오물을 앞에 두고 김두한 의원이 국무위원들을 향해 호통을 치고 있다. [중앙포토]

1966년 9월 22일 ‘국회 오물투척 사건’ 현장. 신문지로 포장한 오물을 앞에 두고 김두한 의원이 국무위원들을 향해 호통을 치고 있다. [중앙포토]

“만약 토지개혁과 주요 기업의 국유화를 주장하는 것이 좌익이라면 조선 사람은 전부 좌익이요, 민족해방과 완전 독립을 갈망하는 것이 우익이라면 조선 사람은 전부 우익일 것이다. 조선의 소련 변방화 거부를 우익이라면 우리는 모두 우익어어야 할것이고 조선의 미국 식민지 배격을 좌익이라 하면 우리 모두는 좌익이라 할 것이다.”

정확한 실제도 없이 좌우라는 이상을 택해야 하는 타락한 시대에 ‘참’을 추구하는 것. “의인은 그의 믿음과 더불어 산다”는 말밖에 없다. 미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광란의 시대가 해방과 분단, 전쟁과 혼란으로 이어진다. 주인과 노예를 거부하는 동학쟁이 수운 최제우의 칼 노래 칼춤, 검결(劍訣)을 한판 부를 판이다.

“때가 왔네 때가 왔네 다시 못 올 때가 왔네. 만년에 하나 날까 말까 한 대장부가 다시 못 올 때를 만났으니, 용천검 드는 칼을 아니 쓰고 어찌 할 것인가~”

에라 쉬~ 모든 것을 부셔 버리듯 칼춤 추듯 김두한은 타락한 시대에 “똥이나 쳐 먹어라 이 새끼들아” 일갈하고 파란의 생을 접는다. 1966년 9월 16일 삼성은 “한국비료주식회사 비료공장 건설자재를 수입한다”며 사카린 원료 58t을 밀수한 사실이 언론에 보도된다. 김두한은 바로 9월 21일 한정식 요정 오진암에서 회식 후 비장의 결투를 준비한다. 바로 22일 정기국회에서 연단에 오른다.

1954년 종로서 민의원 선거 무소속 당선

김두한 의원이 오물을 투척하는 순간. [중앙포토]

김두한 의원이 오물을 투척하는 순간. [중앙포토]

정일권 국무총리, 장기영 경제부총리, 민복기 법무장관, 김정렴 상공장관을 앞에 두고 “오늘날 삼년 몇 개월 동안 부정과 불의를 합리화하고 국민의 모든 재산을 도적질하는 이 내각을 규탄하는 국민의 사카린 올시다. 고루 고루 맛보아야 알지”라며 김두한은 파고다공원(현 탑골공원)에서 가져온 똥을 국무위원들을 향해 퍼부었다.

김두한은 집으로 돌아가며 “이보쇼, 내가 똥물을 던진 것은 말이요, 장관들 개개인한테 던진 것이 아니라 헌정을 무시하면서 밀수사건을 비호하는 제 3공화국 정권에 던진 거란 말이요”라고 당당히 말했다. 헌정사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일지 모를 국회 똥물 투척 사건은 타락한 시대, 타락한 정권에 대한 정당한 칼 노래 칼춤이다. 북두칠성의 사나이 김두한은 이 사건 후 유신정권의 철퇴를 맞고 죽는다.

『김두한 자서전』을 따라 그의 행장을 본다. 김두한은 어린 시절 지금의 광교 다리 밑에서 거지 생활을 한다. 그때 조선극장에서 싸움 영화를 즐기다 샌드백을 치고 역기를 하며 체력을 키웠다. 파고다 공원 담장을 왼손 하나만 집고 훌쩍 넘을 정도의 체력 소유자였고, 종로를 네 등분했던 신마적·구마적·뭉치·샤스를 차례로 꺾은 뒤 우미관을 차지하며 ‘종로의 주먹’이 됐다.

일본 야쿠자 하야시패와 평화협정을 맺은 뒤 김두한은 인천, 부산, 함흥, 신의주 등 전국을 순회하며 각 지역의 주먹들을 평정한다. 일제 말 김두한은 징용을 피해 ‘경성특별지원 청년단’을 만든다. 서울만 3000여 명, 전국적으로는 2만 명에 이르는 청년 대군 조직이었고, 그는 이를 내세워 반공(反共) 대열에 앞장선다.

해방과 함께 좌우익의 피비린내 나는 싸움판에서 반만년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우리 백의민족이 사는 이 땅을 공산주의 종주인 구(舊)소련의 연방으로 만들 수 없다며 공산주의 타도, ‘타공(打共)’작전을 치열하게 벌인다. 대한민주청년총연맹(민청)을 결성, 백색테러를 감행해 180여 차례 무자비함을 선보인다. 이어 미군정에 잡혀 사형선고를 받은 뒤 형무소 수감 중 1947년 정부수립 후 풀려난다.

한국전쟁 때 김두한은 자신의 조직과 학도병을 이끌고 포항전투에 참여한다. 부산 부두 노동자 파업 때 미군을 상대로 임금 쟁취 투쟁을 한다. 그때 부산 앞바다 20리 전방 수백 쌍의 기동선을 본다. 일본 도피를 꿈꾸는 정부 고위층과 사회 유력인사들로 이루어진 민족 모리배들의 행태에 분노하며, 강제로 기동선 1대를 징발하고 이들의 금품을 털어 조국의 운명을 거는 전투에 사용한다. 그리고 부산 광복동 고급 세단이 주차된 늘봄 댄스홀에 쌍권총을 차고 들어가 전쟁에 아랑곳없이 쌍쌍이 춤을 추며 육체의 향연에 도취된 판을 엎고 나서 “또 다시 국가와 민족을 망각하고 춤추러 다니는 년 놈은 부산 앞바다에 수장시켜 버린다”고 총 쏘며 외쳤다.

고문 후유증에 석방 뒤 사람 못 알아봐

‘김두한의 증언’이라는 부제가 붙은 책 『피로 물들인 민족사』(박창규 저, 민국출판사). [사진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김두한의 증언’이라는 부제가 붙은 책 『피로 물들인 민족사』(박창규 저, 민국출판사). [사진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종전 후 1954년 서른여섯 살 나던 해 김두한은 3대 민의원 선거에 종로을(乙)구에서 무소속 당선된다. 상대 후보들이 “김두한은 소학교 2학년 밖에 못 다닌 무식쟁이에 주먹 대장”이란 공격에 “내가 주먹 대장이지만 약자나 여자를 때리는 것을 본 사람이 있냐”며 “나는 국회의원이 되면 어머니의 사랑같이 나를 희생하겠다”고 외치며 국회에 입성한다. 자유당 정권에서 김두한은 친일파 타도 칼춤을 춘다.

김두한 의원은 1956년 이익흥 내무장관 불신임안을 낸다. “이 장관, 당신은 일제 앞잡이, 왜정 경찰 출신으로 민족 운동가들을 탄압하고 일제에 아부 근성으로 이승만 대통령을 마치 제왕으로 알고 맹종하는데, 민주정치에 역행하여 각종 선거에 불법 간섭과 강압을 능사로 대한민국을 일본제국으로 착각하는 당신은 친일파 민족 반역자”라고 일갈하며, 장면 부통령 피습사건의 정치적 책임을 물어 내무장관 불신임안을 내지만 부결된다.

그는 국회 연단에 순국선열 영정을 내걸고 장경근 내무장관을 규탄한다. 1957년 일이다. 국회 속기록의 내용이다.

“장경근은 왜정 때 대표적 친일을 하고 해방 후 국민방위군의 수많은 청소년을 아사, 병사시키고 거창·산청·하동 등에서 죄 없는 양민을 학살했고, 3·15부정선거에 부정 불법 선거를 조장하고 온갖 궤변으로 자유당 정책을 인출하고 이정재, 유지광 깡패를 시켜 장충단 집회를 방해하고 배후 조장하였으니 민주주의 기본 자유의 하나인 집회를 방해하는 민주 반역자로 역사에 고발한다.”

그리고 인촌 김성수를 친일로 모는 강세향 의원에 맞서 “친일한 것은 당신이요. 일제 중추원 참의를 지내고 일본 놈들에게 아부한 자가 적반하장 아닌가”라며 아예 자유당 총재를 향해 “해방 후 민족운동가나 독립투사는 모조리 제거하고 일본 놈의 경찰 밀정을 해 먹던 놈이나 애국지사를 탄압하던 민족 반역자 친일파만을 두둔, 독재의 아성을 쌓고 간계 잘 부리는 악질 간상 모리배들만 살찌니 친일 민족반역자 두목은 누구인가”라고 물었다. 이로써 이 대통령 모욕죄로 징계에 회부된다.

온통 사방이 적이었다. 정의롭지 못한 사람들의 협잡 판에서 민족 협객의 칼춤은 작두날 위에 선 바람 앞의 등불이었다. 4·19로 민주주의가 잠시 푸른 하늘을 보이는 듯했으나 1961년 군사정부가 들어서자 김두한은 애국단을 결성한다. 그리고 1965년 서울 용산 보궐 선거에서 한독당으로 입후보하여 당선된다. 김두한은 국회 첫날 신상 발언을 통해 제3공화국 권력자를 향해 포문을 연다. 그러나 1966년 이른바 한독당 내란음모 사건을 엮어 국가보안법위반, 내란음모, 폭발물사용 위반으로 구속된다.

구속 18일 만에 풀려 나왔지만 중정의 혹독한 고문으로 김두한은 넋 나간 표정으로 “자백을 강요당하며 호된 고문을 받았소”라고 말했다. 그리고 풀려난 지 8개월. 무도한 정권을 향해 회심의 한 판을 준비한다. 국회 똥물 투척 사건이다. 국회 모독죄, 공무집행 방해죄로 구속되고 수감 3개월 만에 병보석(고혈압)으로 풀려난다. 얼마나 혹독한 고문을 받았는지 석방 뒤 사람도 잘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얼이 빠져 있었고, 이빨도 다 빠졌다 한다. 죽음이 바람처럼 부는 시대 제 정신이면 죽는 것이 곧 사는 것이다. 김두한은 종로에서 태어나 종로를 무대로 한 시대를 풍미했다. 김두한의 칼 노래 칼춤을 그려본다.

종로구청·종로문화재단·중앙SUNDAY 공동기획

김태균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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