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빙의·환생’에 독자들 탐닉…여성들 주도 로맨스에 감정이입

중앙일보

입력 2021.09.25 00:20

수정 2021.09.25 01:13

SNS로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SPECIAL REPORT]
‘비주류 문화’ 웹소설 열풍

독자들은 왜 웹소설에 열광하는 걸까. 화제작의 특징과 독자들의 반응을 중심으로 웹소설의 단골 설정과 인기 요인을 키워드로 분석했다.
 
회·빙·환
 
‘2007년, 프랑스 외인부대 구대장이 아프리카 전투 중 상관의 배신으로 사망한다. 그렇게 죽은 줄만 알았던 주인공, 눈을 떠보니 2010년 한국의 고등학생으로 환생했다. 정보국 요원이 된 주인공은 과거 자신이 빠졌던 음모의 실체를 파헤치는데….’ 판타지 소설 『갓 오브 블랙필드』의 줄거리다. 이 작품은 지난 2019년 테니스 선수 정현이 “책 때문에 잠을 늦게 잔 건 처음이었다”며 언급해 명성을 얻었다.
 
죽었던 주인공이 다른 사람으로 환생하거나 과거로 돌아가는 일명 ‘회·빙·환(회귀·빙의·환생)’은 판타지 장르의 웹소설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소재다. 메가 히트작 『전지적 독자시점』이나 『메모라이즈』도 이 회·빙·환 코드를 활용해 히트한 작품이다. 전역 후 귀가 중이던 주인공이 10년 전으로 돌아가 미래를 바꾸고(회귀), 평범한 회사원이 소설에 빙의돼 소설 속 삶을 살거나(빙의), 죽었던 인물이 살아나 자신의 과거를 되돌리는 내용(환생)이 주된 설정이다. 『폭군의 애완동물이 되었다』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공작님, 제발 좀 망하세요!』등 현재 웹소설 플랫폼 카카오페이지 랭킹 1~10위 작품들은 모두 이 회빙환 클리셰를 사용했다. 『갓 오브 블랙필드』를 가장 좋아한다는 조연준(가명·29)씨는 “과거나 미래의 기억을 유지한 채로 새로운 인생을 산다는 스토리가 현실에서는 실현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더 재밌게 느껴진다”며 “‘회빙환’이 나오는 소재는 일단 믿고 보는 것 같다”고 답했다. 이융희 청강문화산업대 교수는 회빙환을 “사람들의 ‘후회’에 대한 욕망을 자극한 콘텐트”라며 “독자들의 내면에 남아있는 후회를 실현시켜줌으로써 대리만족감을 얻도록 하는 일종의 도구”라고 분석했다.

관련기사

 
‘먼치킨’이 주는 통쾌함


TRPG형 게임에서 ‘사기캐(사기 캐릭터·다른 캐릭터보다 상대적으로 강한 캐릭터를 이르는 말)’를 지칭할 때 사용된 용어인 ‘먼치킨’도 웹소설 독자들을 사로잡는 주요 클리셰 중 하나다. 조씨는 “굳이 필요 없는 시련을 겪지 않으니 독자에게 전달되는 스트레스가 없어 시원하게 전개된다”며 “먼치킨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타 등장인물보다 우위를 점하는 장면들을 보면 직장에서 받은 스트레스가 한꺼번에 풀린다”고 전했다.
 
프로야구를 즐겨보는 김정연(가명·24) 씨는 먼치킨 캐릭터가 등장하는 『천재 타자가 강속구를 숨김』을 즐겨본다. 투수와 타자를 겸업하는 야구천재가 메이저리그에 직행해 성공을 거뒀지만, 부인과의 불화로 인해 과거로 회귀한 뒤 야구 대신 가족을 선택한다는 내용이다. 김씨는 “실제 야구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투타 겸업 선수가 등장해 좋은 성적을 내는 걸 보면 속이 다 시원하다”며 “이 작품은 실제 프로야구팀을 모티브로 했기 때문에 현실감도 느껴지고, 대리만족도 된다”고 답했다.
 
이 교수는 “웹소설 독자들은 쉬는 시간을 활용해 웹소설을 읽으며 활력소를 충전한다”며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읽는 글이다 보니 답답한 장면들이 나오면 거부감을 줄 수 있어 자신만만하고 주도적인 먼치킨형 캐릭터들이 각광받게 됐다”고 분석했다.
 
신데렐라는 그만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대학생 박서연(23)씨는 능동적인 여주인공이 등장하는 로맨스 판타지 장르의 웹소설을 즐긴다. 웹소설 플랫폼에 매달 5~10만원씩 지출하는 그는 “기존의 소설에서 등장했던 ‘나약한 여주인공과 백마 탄 남주인공’과는 다르게 여성들이 자신들의 사랑을 쟁취하는 모습이 새로우면서도 시대에 맞는 설정”이라며 “아날로그 출판시장은 아직도 과거에 머무른 듯한 로맨스 설정이 많은데, 웹소설은 이러한 시대 변화를 즉각 반영한다는 장점이 있다”고 말했다.
 
과거 로맨스 판타지는 로맨스 장르에서도 소수에 불과했지만 웹소설 시장이 점차 커지면서 주류가 됐다. 능동적 여성상을 그린 로맨스 판타지 작품인 『재혼황후』 『하렘의 남자들』이 그야말로 ‘초대박’을 쳤기 때문이다. 이런 작품들은 여성 독자들에게 현실에서 맛볼 수 없는 짜릿함과 해방감을 선사한다는 평가를 받는다.
 
동화 『신데렐라』를 모티브로 한 『신데렐라를 곱게 키웠습니다』는 못된 계모로만 인식됐던 캐릭터가 등장인물들의 성장을 돕는 캐릭터라는 설정의 웹소설이다. 장르 연구가 손진원씨는 “남편도 없는 귀족 여성이 세 딸을 키우는 ‘계모’로서 왜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는지 설득력 있게 제시했다”라며 “주인공 엄마가 여성들의 사회 진출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공감을 얻었다”고 설명했다.
 
손씨는 “2015년 이른바 ‘페미니즘 리부트’를 계기로 환상적인 세계 안에서 여성들의 모험담을 그리는 로맨틱 판타지가 주목받기 시작했다”며 “전형적인 ‘신데렐라’식 해피엔딩 대신 여성이 주도하는 연애 이야기를 읽으며 현실의 고달픈 상황을 탈피하려는 경향이 있다”고 전했다.
 
절단신공
 
순문학 독서가 취미였던 김혜진(가명·26)씨는 ‘절단신공’의 묘미에 빠져 웹소설에 중독됐다. 절단신공이란 회차별로 연재되는 웹소설을 적당히 잘 끊어내 독자들에게 다음 에피소드를 구독하게 하는 기법을 말한다. 예전 인기 신문연재 소설의 인터넷 버전이다. 주인공이 위기를 마주하거나, 등장인물들이 사랑에 빠지는 순간을 회차의 마지막으로 끊어내 연독률을 높인다. 김씨는 “긴장되는 순간에 ‘다음 화에 계속’이란 문구를 보면 호기심에 자연스럽게 다음 에피소드를 결제하게 된다”며 “출판도서는 한 권을 통째로 구매해야 하지만 웹소설은 원하는 에피소드만 골라보는 재미가 있다”고 말했다.
 
웹소설 플랫폼은 이런 특징을 살려 ‘기다무(기다리면 무료)’, ‘프리패스(2시간마다 무료 이용권을 지급하는 서비스)’ 등으로 절단신공을 수익 구조와 연결했다. 김경애 목원대 교수는 “웹소설은 하나의 상품이기 때문에 다음 에피소드로 소비가 이어지지 않으면 재생산되기 어렵다”며 “드라마도 시즌 1이 잘 되면 시즌 2가 나오듯, 웹소설도 독자들의 마음을 지속적으로 사로잡는 방식을 찾아낸 것”이라고 답했다.
 
닮은 듯 다른 듯
 
한재원(21)씨는 웹소설의 특징으로 “비슷하면서도 또 다른 줄거리의 작품이 많다”는 점을 꼽았다. 그는 “무협에는 늘 승리하는 등장인물이 나오고, 로맨스에는 사랑에 빠지는 등장인물이 나오는 등 큰 차별점이 없다는 게 단점일 수 있다. 그러나 독자들은 비슷한 선택지가 많으니 원하는 작품을 마음껏 고를 수 있다”고 말했다. 같은 로맨스 장르라도 주인공의 직업이나 성격, 작가 특유의 문체가 다르기 때문에 작품 선택의 폭이 넓어진다는 것이다. 나승연(28)씨는 “비슷한 장르 중에서도 작품만의 미묘한 차별 포인트를 찾는 게 또 다른 재미”라며 “동일한 장르 안에서도 내가 원하는 소재, 원하는 작가를 쉽게 비교하며 볼 수 있다는 게 큰 장점”이라고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