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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기는 없다, 시대적 욕망 대변하는 ‘사이다’ 효과 강력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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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5호 11면

[SPECIAL REPORT]
‘비주류 문화’ 웹소설 열풍

최근 웹소설이 주목받게 된 데는 미디어와 콘텐트의 파편화라는 현상이 있다. 각자의 취향만큼이나 다양해진 콘텐트 시장에서 서브컬처의 위상 또한 자연스럽게 높아졌다. 그런데 웹소설처럼 특정한 세대와 젠더 공동체가 가진 확고한 취향을 드러내고, 그것을 선명한 이야기 장르의 문법으로 풀어내는 콘텐트는 흔하지 않다. 특히 독자들의 동시대적인 욕망을 즉각 반영한다는 점에서 지금 시대에 알맞은 호흡을 가졌다.

웹소설은 적어도 현실을 개선 불가능하다고 말하지 않고, 더 나은 방식으로 개선하고자 분투하는 장르다. 가장 큰 특징은 독자들의 예측 범주를 넘어서기보다 효과적으로 충족하거나 비트는데 그친다는 점이다. 흔히 클리셰를 평가절하하고 비판하는 진지한 비평적 관점들과 달리, 장르의 문법에 충실하거나 세련되게 갱신함으로써 만족감을 준다.

이야기 골격 살리며 더 세련되게 확장

세속적으로 보일지라도 웹소설은 우리 시대의 상징적인 마스터플롯 중 하나다. 마스터플롯이라는 개념은 사람들이 소비하는 문화에 있어서 반복되어 출현하는 이야기 골격을 가리키는데, 하나의 사회 공동체가 공유하는 현실에 대한 인식을 표현하고, 공동체가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가상적 시뮬레이션에 가깝다. 독자들은 웹소설을 통해 허구의 영역에서라도 시련과 갈등을 해결하고 싶어한다. 웹소설의 문법을 이해하려면 우선 웹소설에 대한 사람들의 선호를 받아들이고, 동시에 그러한 현상이 압축하고 있는 공통적 인식과 정치적인 무의식을 짐작해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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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이를 위해서는 웹소설의 인기를 견인하고 있는 특정 장르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웹소설에서는 원본과 표절이라는 개념이 잘 성립하지 않는다. 누구나 웹소설의 장르 문법 안으로 들어오는 한, 원형적인 이야기 골격을 받아들이고 자신만의 이야기로 변형시키거나 갱신함으로써, 마스터플롯을 더 세련된 이야기로 만드는 것이 허용되어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역동적으로 웹소설의 흐름을 만들고 발전시키는 시스템의 힘이자, 작가와 독자가 피드백을 주고받으며 상호작용해온 대화적 결과물이다.

나 혼자만 레벨업

나 혼자만 레벨업

남성취향 장르로 발전한 판타지는 세부적인 하위장르들로 나뉘는데, 핵심은 현실을 판타지 같은 초현실적인 공간, 더 나아가 비디오 게임에서와 같은 장르적 법칙에 충실한 리얼리티로 변화시킨다는데 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레이드물’이다. MMORPG에서 던전의 보스 공략을 표현하는 개념인 ‘레이드’의 파생이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몬스터 사냥과 그에 따른 보상과 성장을 통해서 현실을 극복하고자 하는 주인공의 고군분투를 그린다. 레이드물의 대표작 『나 혼자만 레벨업』은 우리 사회의 ‘능력주의 유토피아’에 대한 판타지를 정확하게 보여준다. 주인공 성진우는 처음에는 생존을 위한 각자도생에 노출된 인물이지만, 점차 각성하여 남들과는 구별되는 성장을 통해 파괴적인 능력을 전시한다. 여기서 개인이 가지고 있는 능력은 게임에서 캐릭터의 능력치 표시처럼 언제든지 시각화 가능하며 타인과의 비교를 통해 위계화된다. 헌터라는 직업과 그들이 살아남기 위해 공략하는 레이드 행위는 끝없는 경쟁에 노출된 현실과 자기계발을 통한 능력의 강화만이 해결책으로 여겨지는 현실의 세태를 정확하게 재현하고 있다.

하지만 레이드물을 기준 삼아 판타지 웹소설이 현실사회의 능력주의를 극단화한다고만 말할 수는 없다. 등장인물들이 책 속의 허구 세계로 들어가는 ‘책빙의물’로 구분되는 『전지적 독자시점』은 지구멸망의 위기에서 혼자만 책의 결말을 알고 있는 주인공 ‘김독자’가 능력주의와는 구별되는 해법을 추구한다. 웹소설의 특징이기도 한 이야기 독자들과의 대화 가능성을 환기하여, 폐쇄적인 허구 안에 갇혀 있는 인물들에게 더 나은 삶을 제공하려는 메타적 장르로 거듭나는 것이다. 『전지적 독자시점』이 뛰어난 성취를 거뒀다고 평가받는 것도 웹소설이 지향해야 할 더 넓은 공감의 가능성을 환기했다는 점에서다.

가상 시뮬레이션 통해 역동적 힘 얻어

남성들에게 현대적인 판타지 소설이 인기라면, 여성취향 웹소설은 사실상 로맨스 판타지(로판)로 요약된다. 엄밀히 말해 로맨스 판타지는 로맨스의 하위장르로, 무대를 일종의 중세-근세 언저리의 서구적 세계관으로 구체화할 따름이다. 로판에서 로맨스의 양상은 기존의 로맨스 장르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로맨스란 주인공들 사이에 발생하는 물질적-심리적 장애물과 갈등을 다루며, 결과적으로는 장애와 갈등을 극복한 주인공들 사이의 결합을 통해서 상징적인 사회적 재구성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재혼황후

재혼황후

흥미로운 건 로판이 판타지를 통해 역동적인 힘을 얻는다는 점이다. 판타지가 물질적인 장애물을 전체 세계이자 하나의 구체적인 시대상으로 제공하고, 이러한 효과는 로판의 갈등을 고전적인 로맨스의 양상으로 되돌려 현대적인 로맨스가 미시화하는 권력의 문제를 다시 거대화한다. 현대 로맨스가 물질적인 갈등에 비해 심리적 갈등을 다루고, 거대한 현실보다 개인화된 삶에 몰두하는 반면, 로판은 궁중의 암투와 거대권력 앞에 노출된 주인공의 운명을 가혹하게 직시한다. 이런 장르가 주는 ‘고구마’와 ‘사이다’의 효과는 강력할 수밖에 없다. 로판을 대표하는 『재혼황후』도 그렇다. 황제에게 배신당한 황후가 스스로 이혼과 적대국 왕과의 재혼을 선택함으로써, 큰 틀의 복수를 수행하는 과정을 전체 로맨스의 장애물로 구성하고, 이를 극복하는 과정 속에 진짜 사랑을 달성해 나간다. 주인공 ‘나비에’는 스스로의 욕망을 결정하고 자신만의 방법으로 달성하고자 하는 욕망의 주체라는 점에서 돋보인다. 미리 결정되고 주어진 결혼에서 주체적으로 선택하는 결혼으로의 이행 과정을 통해 스스로의 정체성과 행복의 기준을 재구성하기 때문이다. 흔히 남성적 판타지에서 권력을 쥔 여성이 가부장적 콤플렉스에 갇혀버리는 것과 달리, 로판에서 권력 지향은 여성과 권력 사이의 매력적인 결합을 암시한다.

이처럼 웹소설은 저마다의 갈등의 논리와 해결 방식을 구체화하면서 우리 시대의 욕망을 대변하는 보편적인 이야기 장르가 되어가고 있다. 물론 거대 플랫폼들이 제시하는 장르 구분이 새로운 장르적 다양성을 시도하기 어렵게 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웹소설은 플랫폼의 독점 상품이 아니라 작가와 독자 사이 역동적인 시스템 위에 놓여 있는 공유지의 성격을 가진다. 웹소설의 한계보다 그 포괄적인 설득력과 향후의 변화 가능성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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