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작스러운 통보
“왜 하필 당신인지…. 아들도 어린데 꼭 가야 하나요?”
솔직히 찜찜했다. 전염병이 한창인 우한에서 온 교민들과 2주 동안 갇힌 공간에서 지내야 한다니…. 태풍이나 아프리카돼지열병(ASF) 검역 현장 지원 업무도 해봤지만, 이번엔 달랐다. 나보다 가족이 먼저 떠올랐다. 하지만 생각과 달리 몸은 짐부터 챙기고 있었다.
“애가 어리다고 배려해 주는 상황이 아니라서…. 맡은 일이라 가야만 해.”
실감
31일 교민 173명이 처음 입소하기 시작했다. 방호복을 입고 엘리베이터에서 객실을 안내하는 역할을 맡았다. 마스크를 쓴 채 캐리어를 끌고 온 교민들은 말 한마디 없었다. 가족끼리도 닿지 않으려 했다. 어떤 교민은 엘리베이터도 혼자 타겠다고 고집했다. ‘무거운’ 분위기가 이런 거구나. 2주 동안 교민과 같이 먹을 도시락을 처음 받아들자 격리 생활이 실감 났다.
갇힌다는 것
격리 생활이 익숙해진 걸까. 하루 70건 되던 민원이 일주일이 지나자 20건으로 줄었다. 임신부가 입덧이 심해 앰뷸런스로 실려 가고, 부친상을 당한 교민이 긴급 외출한 경우도 있었지만 대체로 순탄했다. 부친상을 겪은 교민은 발인 날인 15일 아침 식사를 하지 않고 곧바로 상가로 향했다.
방호복의 무게
도시락과 과일ㆍ떡 등 지원 물품이 박스째 들어오면 직원 29명이 하나하나 분류했다. 그리고는 하루 세 번 도시락이 든 수레를 끌고 2~6층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며 방문 앞마다 도시락을 내려놨다. 처음엔 한 번에 두 시간씩 걸리던 일이 격리 생활이 끝날 때쯤엔 40분이면 충분했다. 하지만 배달을 마치고 나면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는 건 그대로였다.
부치지 못한 답장
퇴소 날 교민이 남긴 편지가 수십장 쏟아졌다. 대부분 “미안하고, 고맙다”는 내용이었다. “어려운 민원을 대하느라 고생하셨다”는 얘기도 많았다. 가장 뭉클했던 건 “오랫동안 떠나 나라를 잊고 살았는데 애국심이 생겨났다”는 내용이었다. 마스크를 쓰고 지냈기에 얼굴도 알 수 없고, 답장도 부치지 못했지만, 꼭 남기고 싶은 말이 있었다.
“제가 좀 더 신경 써 드리지 못해 미안합니다.”
국가란 무엇인가
‘잘못해서 격리하는 게 아니다. 누구나 교민이 될 수 있다’
진천을 떠날 때쯤엔 공무원으로서, 특히 행정안전부 공무원으로서 사명감을 갖게 됐다. 한창 공무원 시험을 준비할 때 떠올렸던 ‘국가란 무엇인가, 국가가 국민을 안전하게 지켜준다는 것은 무엇인가’란 질문. 이젠 좀 더 자신 있게 답할 수 있을 것 같다.
김기환 기자 khkim@joongang.co.kr
김기환의 나공
[나공]은 “나는 공무원이다”의 준말입니다. 정부 부처와 공기업을 중심으로 세금 아깝지 않게 뛰는 공무원이 주인공입니다. 각 분야에서 묵묵히 일하며 헌신하는 이들의 고충과 애환, 보람을 생생하게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