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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환의 나공㉒] 30년 '철도맨'도 설레게 했다, 태평양 건너온 편지 한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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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데이트

설 명절은 누군가에겐 연휴지만, 철도 역무원에겐 ‘비상근무’다. 4일로 짧았던 올해 설 연휴도 귀성길 열차 예매 전쟁은 여전했다. 지난 7일 오전 7시 귀성 열차표 인터넷 예매를 시작하자마자 3초 만에 1만2000명 넘는 대기자가 몰렸다. 서울역 현장 예매에도 300여명이 줄을 섰다. 명절 열차표 예약 전쟁을 두고 ‘코레일 고시’라고 부르는 이유다.

그래서 ‘서울역 지기’ 김용석 한국철도공사(코레일) 서울역 총괄역무팀장을 만났다. 그는 1990년 코레일의 전신인 철도청에 입사한 베테랑이다. 동두천역ㆍ광운대역ㆍ영등포역ㆍ초성리역 등 수도권 역을 거치며 역무(매표ㆍ안내), 승무(열차 내 고객 서비스ㆍ검표)를 경험했다. 아래는 그의 목소리로 듣는 철도 귀성길 관전기다.

태평양 건너온 편지 한 통

최근 서울역에 도착한 한 고객의 편지. 45년 전 열차표 거스름돈을 돌려주고 싶었다며 미국에서 200$ 수표와 함께 보내왔다. [코레일]

최근 서울역에 도착한 한 고객의 편지. 45년 전 열차표 거스름돈을 돌려주고 싶었다며 미국에서 200$ 수표와 함께 보내왔다. [코레일]

편지는 때로 모르는 사람에게 받을 때 더 설렌다. 설 연휴 직전 ‘서울역장님 귀하’라고 쓴 편지를 받았을 때 그랬다. 보낸 사람은 미국 하이포인트에 사는 필립 안. 꾹꾹 눌러쓴 편지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75년 12월 31일 결혼식 후 서울에서 부산으로 가는 맹호열차를 탔다. 거스름돈으로 500원을 더 받았다. 돌려드려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세월이 많이 지났다. 편지로라도 드려야 한다는 생각에 늦게나마 200$ 수표와 함께 부친다. 용서하고, 받아주시면 고맙겠다.”

세상은 아직 따뜻하구나. 철도맨 인생 30주년 맞이 설 선물이었다.

‘같고도 다른’ 귀성길 풍경

자동차가 많이 보급됐고, 명절 해외 여행객도 늘었다지만 정작 철도역에선 실감하기 어렵다. 서울역은 이번 설 연휴도 여전히 귀성길 인파로 붐볐다. 주말마다 5만5000여명이 여기서 기차를 타는데, 이번 설 연휴엔 6만여명이 다녀갔다. 짐을 들어드리는 안내원을 추가 배치하는 것도 수십 년째 똑같다. 가끔 역에 들러 “무조건 고향에 가야 하는 데 표가 없느냐”며 울고불고 매달리는 분을 돌려보내며 함께 아쉬워하는 것도 일상이다.

달라진 풍경도 있다. 최근 역귀성이 부쩍 늘었다. 시골에서 올라온 부모님을 맞으러 나오는 가족이 많다. 명절 선물을 택배로 부치는 경우가 늘면서 손마다 든 선물 꾸러미도 많이 줄었다.

서러운 명절

김용석 서울역 총괄역무팀장이 지난 2017년 추석 열차표 현장예매 당시 길게 늘어선 인파 가운데서 인터뷰하고 있다. [코레일]

김용석 서울역 총괄역무팀장이 지난 2017년 추석 열차표 현장예매 당시 길게 늘어선 인파 가운데서 인터뷰하고 있다. [코레일]

설 연휴 당일 아침엔 구내식당에서 항상 떡국을 먹는다. 하지만 점심엔 구내식당이 문을 닫는다. 주변 식당도 쉬는 경우가 많아 도시락을 싸 와 직원들과 삼삼오오 모여 먹는다. 당연히 고향 얘기가 빠지지 않는다. 내 고향은 경기도 양주, 처가는 충남 공주다. 아내도 같은 회사에 다니다 보니 명절에 고향, 특히 처가에 가기 어려웠다.

역무원은 고향에 가기 어렵지만, 더 많은 사람이 명절 기차를 탔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래서 살짝 귀띔한다. 전 국민이 달려드는 예약 기간은 놓치기 쉽다. 결제기한이 끝난 직후를 노리면 어떨까. 관심이 다소 시들해진 ‘추가모집’ 경쟁률이 더 낮을 때가 많다. 올해도 13일 자정에 결제기한이 풀렸는데 그럴 때 예매하면 한결 낫다.

사라진 낭만

돌이켜보면 예전엔 야간열차를 일부러 타는 사람이 많았다. 열차 안에서 이야기도 나누고, 차창 밖으로 동트는 풍경을 본다든지 하는 낭만을 매력으로 꼽았다. 그런데 2004년 KTX가 등장하면서 확 줄었다. 탑승 시간이 가장 길었던 열차는 무궁화호 서울~진주 구간(8시간)이었다. 이젠 KTX로 같은 구간을 3시간 30분이면 주파한다.

승무원 ‘재량’도 사라졌다. 부산행 표가 없을 경우 중간쯤인 대전ㆍ천안까지 가는 표를 일단 끊은 다음 열차 안에서 연장해 달라고 하는 승객이 많았다. “급한 집안일이 생겼다” “아내가 애를 낳을 것 같다”는 식으로 매달리는 승객 사정이 딱해 수작업으로 표를 고쳐 발급하곤 했다. 하지만 최근엔 매표 과정이 다 전산화돼 이런 경우가 드물고, 사정 봐주기도 어려워졌다.

나는 역무원이다

김용석 팀장이 설 연휴를 앞두고 서울역 플랫폼에서 포즈를 취했다. [코레일]

김용석 팀장이 설 연휴를 앞두고 서울역 플랫폼에서 포즈를 취했다. [코레일]

열차는 365일 24시간 달린다. 주말ㆍ공휴일도 없다. 처음 입사했을 땐 24시간 맞교대 근무였다. 나중에 3조 2교대로 바뀌었다. 역 숙직실에서 잠을 청하는 경우도 많았다. 부산행 막차를 타면 어쩔 수 없이 부산에서 하룻밤 자고 다음 날 올라오곤 했다. 시간에 쫓기는 고객을 응대하는 건 서비스맨의 숙명이다.

전국에서 가장 붐비는 서울역이다 보니 사건사고도 많다. 그런데 사고를 겪으면 겪을수록 아직 세상은 따뜻하다고 느낀다. 승객이 갑자기 쓰러지면 내 일처럼 신고하거나 부축해서 옮기는 경우가 많다. 급할 땐 주변에서 직접 인공호흡까지 하는 경우도 봤다. 설 연휴 승객이 부모님께 받은 선물 꾸러미를 열차에 놓고 내렸는데 돌려준 기억이 있다. 그는 헐레벌떡 돌아와 보따리를 풀었다. “부모님이 직접 만드신 거라 맛있다”며 약과를 건넸다. 그해 설 약과는 참 맛있었다.

김기환의 나공

[나공]은 “나는 공무원이다”의 준말입니다. 정부 부처와 공기업을 중심으로 세금 아깝지 않게 뛰는 공무원이 이야기의 주인공입니다. 각 분야에서 묵묵히 일하며 헌신하는 이들의 고충과 애환, 보람을 생생하게 전합니다.

김기환 기자 kh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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