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한잔]은 우리 삶과 맞닿은 세계 곳곳의 뉴스를 에스프레소 한잔처럼, 진하게 우려내 한잔에 담는 중앙일보 국제팀의 온라인 연재물입니다.
리 씨는 매일 세 끼 밥상을 차려 부모에게 드리고 집 청소·빨래 등 가사를 전담한다. 저녁마다 부모를 모시고 개를 동반해 산책하는 것도 중요한 일과다. 남는 시간에는 주식 투자·운동·독서 등을 한다. 리 씨의 부모는 정년퇴직 후 매월 1만1000위안(약 196만원)의 퇴직연금을 받고 있는데 이 중 리 씨에게 '수당' 명목으로 월 5500위안(약 98만원)을 준다. 이는 지난해 중국 대졸자 평균 초임인 월 5990위안(약 106만원)에 조금 못 미치는 수준이다.
부모의 제안을 받아들인 녠안은 퇴직 후 본가에서 살며 부모와 함께 장을 보거나 요리·산책을 한다. 특히 컴퓨터 등 전자기기 수리는 오롯이 딸의 업무다. 가끔 아버지가 밖에서 술을 드신 저녁이면 아버지의 '대리운전' 기사가 되기 위해 달려간다. 촘촘히 계획을 짜서 매달 1~2차례 가족 여행도 다녀오는 것도 업무다. 그는 "부모님이 잠드셔야 하루 일이 끝난다"고 전했다.
중국 관영 인민망에 따르면 중국에서 전업 자녀가 늘어난 데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청년들이 속출했기 때문이다. 올해 5월 기준 중국의 16~24세 청년실업률은 평균 실업률의 4배인 20.8%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특히 올해 7~8월 사상 최다인 대졸자 1158만 명이 취업 시장에 쏟아지게 되면 중국 청년들의 일자리 상황은 더 악화할 전망이다. 이런 상황 속에 취업난에 시달리는 청년들이 '부모 돌봄'을 일종의 '일자리'로 택하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 자기 자녀에게 '월급'을 줄 여유가 있는 부모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인민망은 "전업 자녀 개념이 가능해진 것은 일부 부모에게 그만한 경제적 여유가 있기 때문이다"면서 "여기에 부모가 자녀와 늘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 겹치면서 '유연한 취업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고 전했다.
SCMP에 따르면 녠안의 부모는 "딸이 만일 좋은 일자리를 찾게 되면 그때 직장에서 일하면 된다"면서 "하지만 딸이 직장을 구하기 싫다면 그냥 집에 있으면서 우리와 시간을 보내면 된다"고 말했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에 따르면 전업 자녀는 취업 시장에서 극심한 경쟁에 시달리고, 취업을 해서도 '996'(오전 9시부터 오후 9시까지 주 6일 일하는 가혹한 업무 환경) 상황에 놓이게 되는 청년층에게 '대안 일자리'로 떠올랐다. SCMP는 "부모와 자녀 모두 진심으로 행복하다면, 전업 자녀에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라고 했다.
인민망은 "요즘은 수입이 많은 것보다는 스트레스를 덜 받는 업무 환경을 선호하는 추세"라면서 "기성세대가 너른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라고 전했다.
반면 전업 자녀는 일시적인 도피처에 불과하다는 지적도 있다. 실제로 공무원 시험 등에 합격해 전업 자녀에서 벗어나는 경우가 많다. 현지 언론들은 "언제든 부모의 퇴직연금이 고갈할 수 있기에 불안정한 자리"라면서 "사실상 백수라는 불안감을 덜기 위한 방편이지 지속 가능하지 않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