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REPORT 리모델링 급한 한국 관광
강원도 속초시 설악동. 이름 그대로 설악산의 관문이다. 1980~90년대 이 가을의 단풍처럼 화려함을 뽐냈던 우리나라 대표 관광지구가 스러졌다. 이들처럼 그곳에 머무는 사람이 거의 없다. 설악동은 낙엽처럼 차곡차곡 쌓인 악재의 무거움을 버티지 못했다. 설악동은 한국 관광의 어제를 보고 오늘을 진단하며 내일을 가늠할 수 있는 공간이다. 지난 10월 둘째 주말의 설악동은 단풍철임에도 을씨년스러웠다.
수학 여행 안 오고 속초 시내로 빠져
설악동은 왜 피폐해졌을까. 지난 16일 오전 5시 30분. 어스름을 뚫고 차들이 소공원(A지구) 주차장으로 향했다. 이미 만차에 가까웠다. 오전 7시쯤에는 차량이 긴 꼬리를 물고는 2㎞ 가까이 이어졌다. C지구 아리랑리조트의 조인옥(60) 사장은 “보통 단풍철엔 이 앞까지 3㎞ 정도 차가 막힌다”고 말했다.
소공원 주차장은 신흥사 소유다. 반면 무료인 B·C지구 주차장은 한산했다. 이곳에서 40년째 건어물 장사를 하는 조차순(72)씨는 “단풍철 2~3주간 반짝 장사가 될 뿐, 사람들이 다 ‘바닷가 쪽’으로 빠져나간다”며 한숨을 쉬었다. 바닷가 쪽은 속초 시내를 일컫는다. 그 옆에서 슈퍼를 운영하는 차모(70)씨는 “단풍철이라 손님이 많으면 노래방이라도 열어놓으려고 했더니, 노래 업데이트 비용 50만원을 뽑을 만큼 사람이 오지 않을 것 같아 접었다”고 밝혔다. 실제로 길가 점포만 몇 곳 운영할 뿐, 2층과 길가 뒤편 점포 20여 곳은 모두 문을 닫았다. 2층으로 향하는 계단에는 새똥이 가득했다. 차씨는 “유령이 나올 것 같지 않으냐”고 되물었다.
설악동 몰락의 한 원인으로 소공원 주차장으로 인한 B·C지구 ‘패싱’이 꼽힌다. 정인철 국립공원을지키는시민의모임(국시모) 사무국장은 “소공원 주차장을 폐쇄하고 관광객이 B·C지구에 머무를 수 있도록 유도해야 설악동이 회생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20년 가까이 맴돌고 있다. 하지만 소공원 주차장을 없앤다고 관광객이 설악동으로 몰릴지는 미지수다. 설악동의 몰락은 관광 트렌드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대규모 관광단지의 현실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C지구 상가 앞에는 리무진 관광버스가 줄지어 서 있었다. 이 버스 중 하나에서 내린 등산객 김모(53, 경기도 고양시)씨는 “새벽 4시에 오색에 도착해 대청봉을 찍고 소공원으로 내려왔는데, 우릴 태워준 버스가 이곳에 대기하는 동안 잠깐 식당에 들렀다”고 말했다. 이런 ‘리무진 무박 산행’은 서울에서 설악산을 다녀오는 경우, 비용은 보통 3만5000원 선이다. 편하고 비용이 적게 들어 인기다. 코로나19로 한때 주춤했지만, 방역 지침이 풀리면서 예약 대기를 해야 할 정도다. 서울~양양 고속도로 등 교통망의 발달은 이런 유행을 부채질했다.
리무진 관광버스 이용 무박산행 유행
대규모 단체관광, 수학여행의 퇴조 역시 몰락을 부채질했다. 특히 식당보다 숙박업소가 휘청이고 있다. 이훈 한양대 국제관광대학원장은 “설악동은 경주·제주와 함께 대규모 수학여행을 위해 조성된 곳인데, 수학여행이 ‘소규모 테마형’으로 바뀌면서 타격을 받은 것”이라며 “게다가 코로나19로 수요가 급증한 소규모·개별 여행과 설악동 같은 대규모 숙박단지는 궁합이 맞지 않는다”고 진단했다. 실제로 설악동의 한 숙박업소 사장은 “과거 설악동에 방이 없으면 할 수 없이 속초에서 숙소를 구했는데, 이제는 속초에 방이 없으면 떠밀리듯 설악동에서 찾는다”고 말했다.
속초시도 올 3월에 2024년까지 총 264억원을 들여 B지구에 홍삼체험센터를 재정비하고 집라인, B지구 주차장과 C지구를 연결하는 799m 길이 스카이워크, 쌍천 출렁다리 등을 만드는 설악동재건사업 추진 계획을 내놓았다. 엄산호 번영회장은 “볼거리와 즐길거리가 생기면 설악동이 다시 주목을 받을 것”이라며 “상인들의 기대감이 크다”고 전했다. 반면 지구 사정에 따라 주민들은 “싹 밀어버려 재개발해야 한다” “현재 인프라를 갖고 살아갈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냥 이대로 놔두자”는 이견을 보이기도 한다.
이훈 원장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국내외 여행 경험이 많아지면서 숙박에 대한 자기 취향이 확실해져 값싼 숙박보다는 비용이 들더라도 취향에 맞고 안전한 숙박을 선호하고 있다”며 “설악동을 비롯한 대규모 단체손님 위주의 관광단지는 현재와 미래 관광 추세에 맞춰 리모델링하지 않으면 한국의 관광 경쟁력에 상처를 남길 것”이라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