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강수연(1966~2022) 별세 이틀째인 8일 장례식장을 찾은 임권택 감독은 낙담한 표정이었다. 강수연이 20대 초부터 한국 최초 월드스타가 된 과정을 함께한 임 감독이다. 그의 영화 ‘씨받이’ ‘아제아제 바라아제’로 강수연은 각각 1987년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아시아 최초, 1989년 모스크바국제영화제에서 한국 최초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임 감독은 “좋은 연기자를 만난 행운 덕분에 내 영화가 좀 더 빛날 수 있었다”고 오랜 페르소나에게 감사를 표했다. 지팡이를 짚고 빈소로 다시 들어서던 그는 고인을 향한 마음들을 확인하듯 입구를 가득 메운 조화를 하나하나 멈춰서 들여다봤다. 배우인 아내 채령은 “너무 황망한 상황이라 감독께서 많이 힘들어하신다. ‘내가 가야 할 자리를 왜 수연이가 먼저 가냐’면서…”라고 중앙일보에 전하기도 했다.
봉준호 "몇달 전에도 뵀는데 실감 안나"
이날 오전 10시 공식 조문이 시작된 서울 강남구 삼성병원 장례식장엔 영화계 안팎의 추모 행렬이 이어졌다. 장례위원회 위원장을 맡은 김동호 전 부산국제영화제 이사장(현 강릉국제영화제 이사장)은 전날 빈소에 들렀다가 8일 오전 9시 30분께 일찌감치 다시 찾아 이날 첫 번째 조문을 했다. 이어 빈소를 찾은 봉준호 감독은 “몇달 전까지 종종 뵀고 얘기를 길게 나눴는데 실감이 안 난다”고 착잡한 심경을 내비쳤다.
영화 ‘고래사냥 2’(1985)를 함께한 배창호 감독은 “1983년 ‘고래사냥’ 1편을 준비할 때도 여주인공 후보로 만났는데 나이(당시 고등학교 2학년)가 어려서 2편을 하게 됐다. 어려운 촬영이 많았는데 내색 없이 야무지게 잘 따라와 줬다”면서 “서구적 마스크지만 한국적인 미도 잘 갖춘 배우였다. (‘고래사냥 2’ 공동 주연한) 안성기와 함께 한국영화사에 연기자로서 큰 획을 그었다”며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강PD, 현장의 대장" 강수연, "소박·검소, 늘 베풀어"
작품마다 촬영현장을 살뜰히 챙겨 “강 PD, 현장의 대장”(이현승 감독)으로 불렸다는 강수연이다. 지난 1월 촬영을 마친 영화 ‘정이’로 복귀하기까지 연기 공백이 길었다. 지금까지 공개된 그의 마지막 주연작은 임권택 감독의 ‘달빛 길어 올리기’(2010)였다.
이 영화를 함께했던 배우 예지원은 강수연을 “평생 남을 돌보고 사신 분. 베푸는 삶이었다”고 추억했다. “월드 스타가 화려해 보이지만 사실 언니(강수연)는 소박하고 정말 검소했다. 영화를 누구보다 사랑했다”면서 “좋은 연기자로도 1등이지만 주변 챙기기론 내가 본 사람 중 최고였다. 어릴 때부터 몸에 배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못 견뎠다”고 부은 눈으로 추억했다. “영화 할 때도 대사를 정말 빨리 외우셨다”면서 “저희 윗세대는 현장이 빡빡하고 굉장히 열악했는데 언니는 안 먹고 안 재워도 아무 일 없었던 듯이 건강하게 잘 버텼다. 그래서 사람들이 더 많이 요구하고 기댔던 것 같다”고 말했다.
배우 강수연(1966~2022) 별세 조문 첫날
배창호 "서구적 마스크지만 한국적 미"
예지원 "늘 베풀던 월드스타, 소박·검소했죠"
부산영화제 이용관 이사장 "존경하고 미안하고…"
그는 또 “아무래도 부산국제영화제 때 타격을 많이 받으셨고 영화제를 지키기 위해 자기 스타일을 다 죽이면서…. 그 인내심을 봤다”면서 “영화제가 정상화 됐는데 다시 모여 풀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게 됐다. 작년 강릉영화제에서 멀리서 본 게 마지막”이라며 스스로 ‘죄인’이라 자책했다.
연상호 "선배님 얼굴 보며 '정이' 후반작업 중…누 안 끼치게"
강수연의 유고작이 된 SF 영화 ‘정이’는 올해 안에 넷플릭스 출시를 목표로 후반 작업 중이다. 빈소에서 만난 연상호 감독은 “(강수연) 선배님이야 한국영화 상징같은 분이고 이번에 새롭게 하는 SF 영화에 나오시면 좋을 것 같아 (출연 제의) 연락을 드렸다”면서 “그전에 하셨던 작품과 촬영방식이 다른데도 적응도 빠르셨고 현장에서 스태프·배우들을 잘 챙겨주셨다. 제작진끼리 ‘역시 강수연이다’ 그런 얘기를 절로 했다. 앞으로도 선배님 얼굴 보면서 마지막 작업해야 하는 상황이라 누를 안 끼치게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