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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향 아니면 월매 하면 되죠”…'할머니 배우'가 꿈이었던 강수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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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강수연이 7일 오후 56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사진은 지난 2016년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을 역임 중이던 강수연이 영화잡지 인터뷰 사진을 위해 포즈를 취한 모습. [중앙포토]

배우 강수연이 7일 오후 56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사진은 지난 2016년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을 역임 중이던 강수연이 영화잡지 인터뷰 사진을 위해 포즈를 취한 모습. [중앙포토]

“60대든 70대든 연기자로 남고 싶어요. (...) 춘향이가 아니면 (춘향이 엄마인) 월매 하면 되죠.”

7일 쉰여섯 나이로 별세한 배우 강수연(1966~2022)은 2011년 일간스포츠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하며 웃었다. 결국 60대를 맞이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고인은 이처럼 한평생을 영화에 바치고자 했던 배우였다.

영화 ‘베테랑’(2015)의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는 명대사가 고인의 술자리 발언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에서 짐작되듯, 고인은 주변을 잘 아우르는 호탕한 영화인이었다. 4세에 아역배우로 데뷔한 뒤로 그가 남긴 여러 말에는 영화를 향한 곧은 열정과 강단이 고스란히 숨 쉬고 있다.

“연기 잘하는 ‘할머니 배우’ 되고파”

고인은 어느 시기의 인터뷰에서건 향후 계획이나 꿈으로 “늙어서도 좋은 배우로 남는 것”을 꼽았다. 1987년 영화 ‘씨받이’로 베니스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을, 1989년엔 영화 ‘아제 아제 바라아제’로 모스크바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일찌감치 ‘월드스타’ 타이틀을 따낸 그였지만, 2011년 인터뷰에서 “아직 다 이룬 게 아니잖나. 예전엔 예전대로, 지금은 지금대로 제게 맞는 작품이 있을 것”이라며 연기에 대한 그치지 않는 애정을 드러냈다.

영화 '씨받이'. [사진 신한영화 제공]

영화 '씨받이'. [사진 신한영화 제공]

영화 '아제아제바라아제'. [사진 태흥영화사 제공]

영화 '아제아제바라아제'. [사진 태흥영화사 제공]

그는 2011년 개봉한 영화 ‘달빛 길어올리기’ 시사회에서 40여년 경력에 대해 “40년이 긴 세월 같지만, 사실 앞으로 40년이 더 남은 것”이라며 “늙어서도 오래오래 좋은 배우로 남고 싶다”고 했다.

2007년 그의 드라마 유작이 된 MBC ‘문희’ 출연을 앞두고 진행된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앞으로 계획을 묻자 “정말 연기 잘하는 할머니 배우가 되는 것”이라 답하며 “원로배우가 주인공인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나 ‘황금연못’ 등을 보면 ‘나도 나중에 저렇게 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을 한다. 아역배우로 시작해 늙어서까지 평생을 배우로 살아간 한 사람으로 좋은 선례가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하기 싫은 것 안하고 싶고, 잘하는 것만 하고 사는 게 꿈”

네 살 때 골목에서 소꿉놀이를 하다 캐스팅돼 우연히 연기를 시작한 강수연이지만, 그는 “아역 때 피로하거나 힘든 기억이 없다. 스스로 너무 즐거워했던 것 같다”(2011)고 회상하는 ‘천생 배우’였다.

영화 '지독한 사랑'. [씨네2000 제공]

영화 '지독한 사랑'. [씨네2000 제공]

고인은 1996년 영화 ‘지독한 사랑’ 개봉에 맞춰 진행한 인터뷰에서 ‘배우가 아니면 무엇을 했을 것 같냐’는 질문에 “밥 벌어 먹기도 어려웠을 것”이라고 답했다. “감정의 변화가 심하고 표현을 직설적으로 해야 직성이 풀린다. 싫은 것은 얼굴에 바로 드러나기 때문에 감출 생각도 안 한다” “하기 싫은 것은 안하고 싶고, 잘하는 것만 하고 사는 게 꿈” 등 자신의 욕망을 솔직하게 털어놓으며 연기에 대한 순도 높은 흥미를 드러냈다.

“배우는 매 작품 발가벗고 임하는 직업”

영화 '미미와 철수의 청춘 스케치'. [중앙포토]

영화 '미미와 철수의 청춘 스케치'. [중앙포토]

1989년 8월 모스크바 영화제에 참석한 임권택 감독(왼쪽에서 두번째)과 '아제 아제 바라아제'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배우 강수연씨(세번째) [사진 제공 김동호]

1989년 8월 모스크바 영화제에 참석한 임권택 감독(왼쪽에서 두번째)과 '아제 아제 바라아제'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배우 강수연씨(세번째) [사진 제공 김동호]

탄탄대로만 달린 듯 보이는 커리어지만, 고인 스스로에게 이른 나이의 성공은 부담이기도 했다. 1996년 인터뷰에선 “촬영 끝낼 때마다 심하게 우울증을 앓는데 배역과 헤어지는 게 애인과 이별하는 기분이 든다”고 했고, 2007년 인터뷰에선 “잘 때도 내 스스로 연기에 대해 불만을 지적하는 꿈을 꾼다. 관객 수나 시청률에 대한 스트레스도 평생 있을 수밖에 없다”고 털어놨다. 그러면서도 “연기자도 프로인 만큼 이런 숫자로 평가받는 게 당연하다. 매번 흥행작만 찍을 순 없는 것”이라며 스스로를 다독이는 말을 덧붙였다.

2011년에는 “어린 나이에 너무 큰 상을 받았다. ‘월드스타’라는 기대가 버겁던 시절도 있었다. 그런 세월을 겪으면서 배우는 한 번의 성공을 발판 삼아 다음의 성공으로 옮겨가는 게 아니라, 매 작품 발가벗고 새롭게 임하는 직업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깨우침을 전하기도 했다.

“영화제 주인은 오직 영화와 관객”

강수연은 2015년부터 2017년까지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으로 활동했다. 사진은 2017년 제22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 기자회견에 참석한 모습. 송봉근 기자

강수연은 2015년부터 2017년까지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으로 활동했다. 사진은 2017년 제22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 기자회견에 참석한 모습. 송봉근 기자

고인은 연기자로서뿐 아니라 스크린 밖에서도 한국 영화계 발전에 중추 역할을 도맡아 했다. 1996년 부산국제영화제 출범 초기부터 집행위원 등으로 활동한 그는 세월호 참사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다이빙벨’을 둘러싼 논란으로 영화제가 파행으로 치닫자 2015년 ‘구원투수’ 격으로 집행위원장을 맡았다. 1996년만 해도 “하기 싫은 것은 안하고 싶다”던 고인은 2016년 인터뷰에서는 “평생 싫은 사람은 안 만나고, 내 주관대로 행동했는데, 영화제 들어와서 그게 다가 아니란 걸 처음으로 느꼈다. 솔직히 많이 힘들었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하지만 영화제가 망가지는 순간 그 피해는 고스란히 관객과 영화인들이 받는 것 아닌가. 집행위원장 직책을 떠나 대한민국 영화인으로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던 고인은 결국 2017년까지 지속된 갈등의 책임을 안고 사퇴했다.

2017년 영화제 폐막식을 끝으로 사퇴하면서도 고인은 “영화제의 주인은 오직 영화와 영화를 사랑하고 찾아주는 관객”이라며 부산국제영화제를 정상화하고자 하는 의지를 드러냈다. 그는 “그 외의 어떤 것도, 무슨 말도 영화제를 훼손하고 방해할 수 없다. 영화와 관객이 있는 한 영화제는 안정적으로 자리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강수연은 2017년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 자리에서 물러난 뒤 공식석상이나 작품에서 모습을 거의 드러내지 않았다. 사진은 지난해 10월 22일 강원 강릉아트센터에서 열린 제3회 강릉국제영화제 개막식 레드카펫 행사에 참석한 모습. 연합뉴스

강수연은 2017년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 자리에서 물러난 뒤 공식석상이나 작품에서 모습을 거의 드러내지 않았다. 사진은 지난해 10월 22일 강원 강릉아트센터에서 열린 제3회 강릉국제영화제 개막식 레드카펫 행사에 참석한 모습. 연합뉴스

“윤 선생님 수상 소식에 눈물”

집행위원장 사퇴 이후 공식석상이나 작품에서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강수연은 지난해 배우 윤여정(75)이 영화 ‘미나리’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뒤 본지와 통화에서 “윤여정 선생님은 여태까지도 굉장히 인정받는 배우였지만 세계시장에서 그렇게 당당하게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게 눈물 났다”는 소감을 밝혔다.

그는 30여년 전 자신이 국제영화제에서 수상했던 당시에 대해 “베니스는 상을 타리란 상상도 못해 참석 못 했고 모스크바영화제 때 참석했는데 유럽 관계자들은 한국이 어딨는지도 몰랐다. 그러다 1990년대 초중반부터 급격하게 커진 한국영화에 대한 관심을 느꼈다”고 회상했다. 노장 윤여정이 이룬 쾌거가 “정말 힘이 됐다”던 강수연은 올해 연상호 감독의 SF 영화 ‘정이’로 복귀할 예정이었지만, 이 작품은 끝내 그의 유작으로 남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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