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3654일
2014년 4월 16일에서 3654일, 만 10년이 흘렀다. 기억 속 세월호는 여전히 기울어진 선체 위태로운 모습 그대로다. 국민 생명이 최우선인 안전한 나라는 아직 요원하다는 뜻이다. 그래도 남겨진 이들은 슬픔의 심연(深淵)에만 갇혀 있지 않았다. 304명을 가슴에 묻고 새긴 채 안간힘을 다해 살아냈다. 마음 치유사로 다시 선 생존 단원고 학생, 기간제 교사 딸의 차별을 철폐하고 순직을 인정받은 아버지, 다른 재난 현장을 찾아 봉사하는 어머니들, 세월호 이준석 선장의 사죄를 끌어낸 목사…. 이들에게 지난 10년의 의미를 물었다.
지난 11일 만난 김씨는 안산 4·16 민주시민교육원 기억관 2층 교무실의 딸 책상 앞 의자에 앉아 사고 전날을 회상했다. 그는 “딸은 학생과 처음 떠나는 수학여행에 들떴고 바빴다”고 기억했다. 김초원씨는 사고 당일이 생일이었다. 18일 새벽 2시에 구명조끼도 입지 않은 채 학생들이 선물한 귀걸이랑 목걸이를 한 모습 그대로 떠올랐다.
참사 이후 30년 회사 생활을 정리하고 경남 거창 고향으로 내려와 시골 농부로 생활하며 안산과 수원, 광화문 정부종합청사 등을 오가며 바쁘게 활동했다. 결국 딸의 순직은 2017년 5월15일 문재인 당시 대통령의 지시로 이뤄졌다. 김씨는 “기쁜 마음과 동시에 대통령 말 한 마디로 될 일이 왜 그렇게 어려웠을까 씁쓸했다”고 했다. 참사 2년 3개월 만인 2018년 1월 김초원 교사는 또다른 기간제 교사 이지혜씨 등 단원고 교사 8명과 함께 국립대전현충원 묘역에 안장됐다.
김씨는 2017년 세월호 인양 이후 유류품으로 받은 딸의 깨진 주민등록증을 국가유공자 유족증과 함께 지니고 다닌다. 그는 “잊으라는 사람들도 있지만 땅에 들어가야 없어질 아픔”이라며 “그래도 딸을 대신해 기간제 차별을 없앴다는 의미를 남겨 위안을 삼는다”고 말했다. 앞으로 10년은 세월호 유족을 향한 혐오를 씻는 게 목표다. 김씨는 “추모 기억 행사가 돈을 더 받기 위해서라는 말이 가장 서글프다”며 “이미 보상은 참사 그 해에 끝났다. 세월호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 소리를 더는 듣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