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은 어떤가요. 얼마나 적막하나요. 저녁이면 여전히 노을이 지고 숲으로 가는 새들의 노랫소리 들리나요.” (아네스의 노래 -영화 ‘시’)
윤정희를 대신해 한국영화공로상을 받은 진희 씨는 "어머니는 매일의 생활 속에서도 환상 세계와 현실의 만남을 겪으셨다. 지난 10여 년은 중병과 싸워야 했지만, 영화 ‘시’와 여러분의 애정이 멀리 있는 어머니를 행복하게 했으리라 믿는다"고 감사 인사를 했다. 시상자로 나선 ‘시’의 이창동(69) 감독은 "10여년 동안 진희 씨가 얼마나 지극한 정성으로 엄마를 돌보았는지, 그러면서도 겪지 않아야 할 마음고생을 얼마나 겪었는지 누구보다도 잘 안다"고 말했다.
다음날 중앙일보와 만난 백건우(77)는 "병석의 엄마를 위로하기 위해 진희는 간병 중에 자주 바이올린을 켰다. 마지막 날 아침에도 ‘보칼리제’를 포함해 두 시간 반 넘게 많은 곡을 연주했다. 시상식에서도 가사 없는 노래인 ‘보칼리제’로 말 없는 가운데 마음을 전달하고 싶었다. 원래 피아노 반주가 있는 곡이지만 진희 혼자 연주해 달라고 부탁했다"고 말했다.
백건우가 전하는 배우 윤정희의 마지막
"한 영화 인생을 이 작품으로 마칠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습니다. ‘시’는 하늘에서 내려준 선물이에요."
그는 주로 이창동 감독의 이야기를 조용히 들었고, 감독과 관객에게 감사를 표시했다. 병에 관해서는 이야기하기 힘들다 했다. 이날 상영 티켓은 일찌감치 매진됐고, 200여 명의 관객은 두 사람의 대담에 귀를 기울였다. 백건우는 "당시 이창동 감독의 제안을 시나리오도 안 보고 그 자리에서 수락했다"고 돌아봤다.
생활고 속에서도 세상의 아름다움을 볼 줄 아는 ‘미자’는 한 여중생의 자살에 외손자가 연루돼 있음을 알게 된다. 지속적인 집단 성폭행으로 동급생을 죽음에 이르게 했음에도 가해자 부모들은 합의금을 걷어 사건을 무마하려 한다. 미자에게 피해 여학생의 어머니를 설득해 합의해 오라고도 종용한다. 조금도 뉘우치지 않는 손자의 모습에 미자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대속에 나선다.
결정적인 순간은 부모들을 대신해 협상하고 설득하기 위해 피해자 소녀의 엄마를 찾아간 장면을 촬영하던 날. 미자는 주변 풍광에 도취해 왜 갔는지도 잊은 채 피해자 엄마에게 한참 다른 얘기를 하다 돌아선다. 이 감독은 “심리적 붕괴를 보여주는 이 장면이 중요하니 잘해야겠다고 선생님은 여러 차례 얘기하셨다”며 “전날 여의도 댁에서도 백 선생님 상대로 대사 연습을 많이 하셨다더라. 다음날 제작부에서 홍천 촬영장까지 모시는데 공교롭게도 길을 잃어 1시간 반 이상 늦었다. 그 과정에서 너무 힘들어져 울면서 촬영을 못 하겠다고 하셨다”고 돌아봤다.
기억은 잃었지만 느낌은 잃지 않았다.
“그렇게 대사를 못 외우실 정도로 기억력이 나빠지셨는데 어떻게 하셨을까 여러분들은 생각하실 텐데, 그게 윤정희라는 배우가 가진 에너지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거의 모든 장면에, 모든 커트에…”
객석에서 두 손을 모은 채 지켜보던 진희 씨가 끝내 눈물을 쏟았다. 부녀는 지난 2019년 "알츠하이머 증상이 10년쯤 전에 시작됐다"고 투병 사실을 공개했다. 윤정희는 데뷔 50주년을 맞은 2016년 "아마 100살까지 살 수 있을까? 그때까지 (영화) 할 거예요. 영화는 인간을 그리는 건데, 인간이 젊음만 있나요"라고 했다. 되짚어 보면 병이 많이 진행됐을 시점이다. 늘 함께 다니던 반려의 눈엔 이룰 수 없는 소망을 말하는 모습이 가슴 아팠을 법도 하다.
영화와 음악, 각자의 영역에서 주인공이었지만 서로의 영역에서는 상대를 빛내주던 두 사람이었다. 백건우는 남은 삶에서 “하루하루 새로움을 발견하고 새로운 세계를 만나고 싶다. 그게 예술가의 길”이라고 말했다. ‘미자’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