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 반 걱정 반. 지금 제주도 여행길에는 어쩔 수 없는 염려가 뒤따른다. 사람이 너무 몰려서다. 코로나 시대의 휴양지이자 피난처로 사랑받고 있지만, 최근 확진자가 급증하고 있다는 소식이 연일 들려온다. 기왕 떠나는 제주도 여행이라면 거리두기를 실천하며 즐길 수 있는 비대면 여행지를 찾는 게 현명한 선택이겠다. 시작은 소위 ‘핫플레이스’에 대한 강박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조금만 시야를 돌리면 보다 한적하고 안전하게 여행지를 찾을 수 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제주도는 크고 누빌 곳이 많다.
비밀의 숲속으로
장대한 삼나무와 편백 숲 사이로 이어진 오솔길. 사려니숲을 대표하는 이미지는 사실 그곳에만 있는 게 아니다. 서귀포시 남원읍 이승악(이승이오름) 자락의 숲도 비견할 만큼 아름답다. 누런 소들이 태평하게 풀을 뜯고 있는 신례리 마을 목장 뒤편에 그윽한 숲이 숨어 있다. 오름 둘레를 한 바퀴 도는 2.5㎞ 길이의 오솔길 주변으로 사스레피나무‧조록나무‧곰솔 등 다양한 나무가 뿌리내리고 있다.
이승악 등산로 앞 갈림길에서 우측으로 나와 10여 분 더 들어가면 한라산둘레길 ‘수악길(돈내코~수악~이승악~사려니오름, 16.7㎞)’로 접어든다. 그 길목 초입에 그림 같은 삼나무 숲길이 있다. 삼나무숲의 매력은 그 특유의 매끈하고 가지런한 멋에 있다. 하늘로 쭉쭉 뻗은 삼나무 곁에 서면 그림 같은 기념사진을 남길 수 있다. 인적이 드물어 숲을 독차지한 사진을 수백장 찍고 나올 수 있다. 삼나무숲에 눈이 쌓인 날은 그윽한 멋이 더할 테다. 이승악은 아직 육지까지 그 명성이 닿지 않은 비밀의 장소다. 숲길을 거니는 동안 산보하는 주민과 노루를 마주쳤을 뿐 관광객은 보지 못했다.
무인도를 거닐다
차귀도는 바닷속에서 화산이 폭발하며 태어난 수성화산체다. 크게 죽도와 와도로 나뉘는데, 섬 전체가 천연기념물 422호이자,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으로 지정돼 있다. 바다 위에 얌전히 누운 것처럼 보이는 차귀도는 가까이 보면 전혀 다른 생동감으로 다가온다. 분출하지 않은 마그마가 돌기둥처럼 서 있는 장군바위, 비상하는 독수리를 닮은 독수리바위(지실이섬) 등 기기묘묘한 생김새의 바위들이 죽도 앞바다에 펼쳐져 있다. 먼 옛날 화산폭발의 생생한 흔적이다.
차귀도를 즐기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섬에 드는 것이다. 고산리 자구내포구(차귀도포구)에서 차귀도 본섬인 죽도로 들어가는 유람선(왕복 1만6000원)을 탈 수 있다. 10분이면 섬에 닿는다. 유람선 관계자는 “2년 전만 해도 55인승 유람선이 오전 9시 30분부터 매시 30분마다 사람들을 실어 날랐지만, 요즘은 하루 2회 정도만 운항한다”며 “최소 인원(20명)을 못 채워 배를 안 띄우는 날도 있다”고 말했다. 코로나 사태 이후 단체 여행객이 사라지며 탑승객이 크게 감소한 탓이다. 덕분에 차귀도를 찾은 여행자의 만족도는 크게 올라갔다. 차귀도에 머물 수 있는 1시간 10분 남짓한 시간 동안 섬 곳곳을 보다 여유롭게 누빌 수 있게 되어서다.
차귀도는 전체 면적은 0.16㎢(약 4만8400평)에 불과하지만, 제주도 부속 섬 중에서 가장 큰 무인도다. 차귀도를 한 바퀴 도는 4.1㎞ 길이의 탐방로가 조성돼 있다. 섬 남쪽 끄트머리의 장군바위 전망대가 가장 전망 좋은 장소다. 붉은빛이 도는 화산 송이 절벽과 장군바위, 그리고 멀찍이 수월봉과 산방산까지 눈에 담을 수 있다. 차귀도의 정수리쯤 되는 볼레기언덕 위에 고산리 주민들이 세운 아담한 등대가 있다. 등대 앞에 서면 차귀도의 억새 평원이 한눈에 들어온다.
자연이 빚은 하늘공원
서귀포시 표선면 성읍리의 백약이오름(357m). 인지도는 떨어지지만, 전망은 경쟁력이 충분하다. 용눈이오름‧동거문오름‧다랑쉬오름 같은 걸출한 오름을 가까이 두고 있어, 인파가 몰리는 일도 드물다.
대부분의 여행 서적이 백약이오름을 다룰 때 난이도를 ‘하’로 적는다. 그만큼 길이 쉽다. 오름 입구에서 나무 계단을 따라 30여 분만 오르면 어느 덧 정상부에 이른다. 치마나 단화 차림의 관광객, 어린 아이도 단숨에 오를 수 있다. 스틱이나 등산화는 필요 없다.
백약이오름과 이웃한 비치미오름(344m)은 분위기가 또 다르다. 빽빽한 편백숲과 솔숲을 올라 정상으로 향한다. 길이 험하지는 않지만, 정상이 주는 해방감이 대단하다. 개오름‧민오름‧성불오름‧돌리미오름 등의 크고 작은 오름들이 사방으로 둥지를 틀고 있다. 억새가 춤추는 정상부 평원에는 아무도 없었다. 불멍·물멍·숲멍이 아니라 ‘오름멍 때리기’를 한참 하다 언덕을 내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