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화점 명품관 ‘오픈런’ 행진…중저가는 매출 수백억씩 감소

중앙일보

입력 2021.12.18 00:20

수정 2021.12.18 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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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REPORT]
코로나 블루, 마음도 위중하다

지난달 2일 서울 신세계백화점 본점에서 명품관 개장을 기다리는 시민들이 장사진을 쳤다. [뉴스1]

지난 15일 오전 9시 서울 강남구 신세계백화점 강남점. 굳게 닫힌 명품관 셔터 앞에는 수십 명의 사람이 줄지어 서 있었다. 곳곳에는 간이 의자와 돗자리도 눈에 띄었다. 이들의 목표는 단 하나. 10시부터 시작되는 샤넬 매장 입장 명단에 이름을 올리기 위해서다. 대기 줄에 서 있던 30대 김모씨는 “샤넬 재고는 언제, 얼마나 풀릴지 몰라 오픈런(매장이 오픈하면 바로 달려간다는 의미)을 하는 게 최선”이라며 “새벽 6시부터 대기를 했는데도 13번을 받았다”고 답했다. 오픈런을 위해 경기도 평택에서 첫차를 타고 왔다는 박모(28)씨는 “코로나19 이전에는 해외여행에 목돈을 썼지만, 지난 2년간 여행을 갈 일이 없어 돈을 모으다 처음으로 명품 가방을 사기로 했다”며 “코로나 때문에 밖에 나가지 못해 쌓인 스트레스를 명품 구매로 풀고 싶다”고 말했다.  
 
루이비통코리아 작년 매출 1조원 넘어
 
코로나19 확산이 불러온 소비 위축은 내수시장을 울상짓게 했지만 ‘에루샤(에르메스·루이비통·샤넬)’을 필두로 한 고가 명품 브랜드에게는 호재가 됐다. 과거 외식·여행 등에 사용되던 여가 비용이 사회적 거리두기의 영향을 받아 명품 지출 비용으로 이동했기 때문이다. 지난해 3대 명품 브랜드인 에르메스, 루이비통, 샤넬은 매출 성장세를 기록하며 코로나 악재를 가뿐히 뛰어넘었다. 에르메스코리아는 지난해 전년 대비 15.8% 증가한 4190억원의 매출을 기록했고, 루이비통코리아의 경우 지난해 1조467억원의 매출 실적을 올려 유일하게 매출 1조원을 넘긴 명품 브랜드로 우뚝 섰다. 올해 샤넬(4번), 루이비통(5번) 등의 명품 브랜드가 자사 제품 가격을 인상한 것을 고려하면 매출 상승세는 당분간 계속될 것으로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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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지난해 명품 시장이 급성장한 데에는 코로나19에 억눌려있던 소비심리가 분출하는 이른바 ‘보복 소비’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분석된다. 시장조사기업 유로모니터에 따르면 올해 한국 럭셔리 상품 시장은 15조 8800억원 규모로 전년 대비 4.6% 성장하며 세계 7위에 올랐다. 코로나19의 영향으로 여행길이 막히고, 외출도 줄어들게 돼 쌓인 여윳돈이 고가 명품 지출로 이어진 것이다. 지난 4월 구인·구직 매칭 플랫폼 사람인 설문 조사에 따르면 보복 소비 경험자들은 코로나 블루 해소(55.5%)와 집콕에 따른 구매 욕구 상승(46.6%)으로 보복 소비에 나섰다고 전했다. 홍희정 유로모니터 뷰티&패션 부문 총괄연구원은 “코로나19 확산 이후 급격히 부상한 보복 소비가 명품 시장에 새로운 트렌드로 자리 잡고 있다”며 “향후 몇 년간 명품 시장을 이끌 주요 트렌드로 보인다”고 전했다. 명품 브랜드의 인기가 날로 치솟자 주요 판매처인 백화점 명품관 매출도 덩달아 올라 올해 상반기 국내 3대 백화점(롯데백화점, 현대백화점, 신세계백화점) 명품관 매출은 45% 이상 증가했다.


이러한 명품 보복 소비의 이면에는 중저가 브랜드의 부진이 자리 잡고 있다. 보복 소비의 타깃이 해외, 고가의 명품 브랜드에만 국한돼 국내에서 활약하던 매스티지 브랜드의 경우 코로나19에 직격타를 맞았다. 대중(mass)과 명품(prestige)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등장한 매스티지(masstige) 브랜드는 중저가 수준의 가격대와 명품 못지않은 품질로 2000년대 초반부터 큰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한때 백화점 1층(명품관)의 터줏대감이었던 MCM(성주디앤디)과 루이까또즈(태진인터내셔날)는 지난해 매출이 각각 1813억원, 229억원씩 감소해 기존의 명성을 이어나가지 못했다. 인디안, 올리비아로렌을 유통하는 세정도 매출이 500억원 이상 감소했다. 중저가 매스티지 브랜드를 중점으로 판매하던 도심형 아울렛인 NC백화점, 2001아울렛 등도 덩달아 영업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다.
 
‘과시 소비’ 뛰어넘을 ‘가치 소비’ 유도를
 
중저가 쥬얼리, 코스메틱 시장을 공략했던 브랜드는 온라인 쇼핑 채널의 최저가 판매 전략에 휩쓸려 보복 소비의 반사이익을 누리지 못했다. 코로나19 확산 이전 전국 130여 개에 달하던 OST 매장은 12월 기준 90개로 축소됐으며, 더페이스샵, 이니스프리, 에뛰드하우스 등은 100개 이상의 매장이 줄지어 폐점했다. 이니스프리 관계자는 "코로나19 타격으로 오프라인에서는 지역별 거점매장에만 집중하는 방식으로 변경했다”고 전했다.
 
고가제품에 분출되는 보복심리와 온라인 채널 확대로 인한 초저가 소비 열풍이 중첩되면서 중저가 브랜드의 전멸은 당분간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유진투자증권 이해니 연구원은 “코로나19 동안 외출, 여행에 쓰지 못한 돈을 보복 소비로 해소했다”며 “급격히 상승한 자산가치에 대한 기대심리와 높아져 버린 소비 패턴으로 ‘K자형 소비 양극화 현상’은 쉽게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중저가 브랜드의 몰락은 소비자에게도 이롭지 않다. 고가 명품 브랜드가 지속해서 가격을 인상하는 상황에서 중저가 브랜드가 무너지게 되면 소비자들이 고품질, 적정 가격의 ‘가성비’ 상품을 구매하기 어려워진다. 또한 중저가 브랜드 대다수가 국내 브랜드라는 점을 고려하면 국내 패션 산업이 입게 될 타격도 무시할 수 없다. 허경옥 성신여대 소비자생활문화산업학과 교수는 “보복 소비가 계속되면 앞으로는 중저가 브랜드가 사라져 소비자가 원하는 가격대에 물건을 구매하기 어려워질 수 있다”며 “중저가 브랜드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가격대비 품질이나 성능을 내세우는 등 적극적인 차별화와 브랜드만의 가치를 살려 과시 소비를 뛰어넘을 수 있는 가치 소비를 유도해야 한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