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배구 기적 만드는 두 리더십
라바리니 감독은 경기 중엔 누구보다 냉정하고 치밀한 사람이다. 8강전 터닝포인트 중 하나는 4세트까지 벤치에 있던 박은진(22·KGC인삼공사)을 5세트 선발로 투입한 거였다. 그는 예리한 서브로 리시브 라인을 흔들어 역전을 이끌었다. 대표팀 막내급인 박은진은 “감독님이 서브 지점을 일일이 알려줬다”고 전했다.
선수 출신 아니라 ‘라떼’ 훈계 안 해
다치면 “배구 인생 길다” 출전 만류
상대 정확하게 분석해 맞춤 전략
선수 장점 살려 적재적소 투입
친구 같지만 치밀·냉정한 승부사
라바리니 감독은 권위적인 리더가 아니다. MZ세대(1980년대 초~2000년대 초 출생한 밀레니얼 세대와 1990년대 중반~2000년대 초반 출생한 Z세대)가 반감을 갖는 “라떼는(나 때는) 말이야”는 말을 아예 할 수 없는 사람이다. 라바리니 감독은 배구 선수로 뛰어본 적이 없기에 ‘라떼’가 없다. 그래서 훈계할 게 없다.
그는 단지 배구를 좋아했다. 10대 시절 배구 공부를 시작해 16세 나이에 유소년 배구팀 어시스턴트 코치가 됐다. 이후 이탈리아 청소년 대표팀 코치를 거쳐 유명 클럽팀을 차례로 맡았다. 그래서인지 선수들을 존중하는 태도가 몸에 익었다.
지난해 태국에서 열린 올림픽 예선을 마치고 돌아온 김희진은 “눈물이 났다”고 했다. 종아리 부상과 소속팀과 다른 포지션을 맡느라 힘들 때였다. 라바리니 감독은 김희진에게 “넌 나의 어포지트(라이트 공격수)”라며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김희진은 “감독님이 곰 인형을 가리키며 ‘저렇게 가만히 있는 게 아니라 배구를 하는 널 보고 싶다’고 했다. 그 말을 들으니 힘이 났다”고 했다. 김희진과 라바리니 감독은 평소에도 장난을 치는 사이다. 라바리니 감독의 통역원이 “한국에서는 감독의 위치가 높다”고 하자, 그는 김희진과 키를 재더니 “나보다 (선수가) 더 큰데?”라고 말한 동영상이 화제가 됐다.
올림픽 예선에서 대표팀 에이스 김연경이 복근이 찢어지는 부상을 입었다. 당시 라바리니 감독은 “네 배구 인생은 길다”며 그의 결승 출전을 만류했다. 하지만 김연경은 “감독님 배려가 너무 고마웠다”며 오히려 이를 악물고 뛰어 이겼다. 존중과 배려를 통해 선수의 마음을 움직이는 게 라바리니의 커뮤니케이션 방식이다.
그런데도 라바리니 감독은 권위가 있다. 스스로 내세우는 권위가 아니라 선수들이 그의 실력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대표팀 세터 염혜선(30·KGC인삼공사)은 “라바리니 감독님은 플레이 하나하나를 할 때마다 고칠 점을 알려줬다. ‘1토스 1평가’였다”고 했다. 센터 양효진(32·현대건설)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양효진은 “로테이션이 한 번 바뀔 때마다 감독님이 지시를 내린다. 처음에는 너무 복잡해서 따라가기 힘들었다”고 했다.
라바리니 감독과 함께 온 수석코치 세자르 에르난데스도 뛰어난 전략가다. 그는 세계 최정상급 클럽인 터키 바키프방프에 있다. 라바리니 감독 덕분에 한국에 왔다. 둘은 선수들을 감정적으로 다그치는 게 아니라 기술적으로 개선하길 요구했다. 선수들이 어려워해도 일관성을 가지고 주문했다. 여러 시행착오를 거쳐 한국대표팀은 도쿄올림픽에서 강한 팀워크를 만들었다.
2018년 브라질 미나스 테니스 클럽 사령탑이었던 라바리니 감독은 세계클럽선수권 우승을 이끌었다. 당시 그와 결승에서 맞붙은 팀은 김연경이 뛰고 있던 엑자시바시(터키)였다. 두 배구 고수가 서로를 알아본 경기였다. 마침 한국대표팀은 세계적인 흐름을 따라가기 위해 외국인 지도자 영입을 고려 중이었다. 오한남 대한배구협회장은 김연경과 대화하다 라바리니 감독을 후보 중 하나로 생각하게 됐다. 결국 라바리니 감독과 김연경은 도쿄올림픽에서 여자배구의 새 역사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