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욱 경기문화재단 연구사는 “숙종은 북한산성의 정문인 대서문을 지나 수문~행궁~동장대~동문(대동문)을 거쳐 흥인지문을 통해 환궁했다”고 말했다. 이 코스가 ‘숙종의 길’이다. 숙종은 유사시 왕의 거처가 될 행궁을 살피러 갔다. 서울의 진산(鎭山·마을이나 도시를 품고 있는 산) 북한산을 산성과 문에 걸린 편액 중심으로 둘러봤다.
편액으로 본 북한산 이야기
#숙종의 길
숙종 행차를 앞두고 대서문 길을 정비했다. 오솔길 수준이었다. 지금처럼 널찍한 길이 난 것은 1958년이다. 이승만 대통령이 대서문을 찾을 때였다. 신향희 북한산 자연환경 해설사는 “당시 최헌길 경기도지사가 미군 중장비를 동원해 길을 만들었다”고 전했다.
대서문 편액은 이승만 대통령이 썼다. 편액(扁額)은 널빤지에 그림·글씨를 새긴 액자를 일컫는다. 현판(懸板)으로도 부른다. 이광호 연세대 명예교수는 “기둥에 걸린 주련(柱聯)이 건물의 내용, 즉 좌우명을 보여준다면, 현판은 그 건물의 고유 이름표이면서 해당 건물의 특성을 함축적으로 담고 있다”고 말했다.
누가 글씨를 썼는지를 알려주는 낙관(落款)은 ‘전주이씨승만우남인신장수(全州李氏承晩雩南印信長壽)’다. 한국서예협회 관계자는 “두인은 편액의 오른쪽 위에, 낙관은 왼쪽 아래에 자리 잡아 편액의 균형을 잡아주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고 밝혔다. 낙관의 ‘우남’은 이승만 대통령의 호다. ‘인신’은 도장을 뜻한다. 그렇다면 ‘장수’는 왜 붙었을까. 권상호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교수는 “글 새긴 이가 글쓴이를 위한 바람을 넣는데, 이승만 대통령의 장수를 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편액 뒤에 다른 편액이 있다. 경기도지사였던 최헌길의 ‘북한산성대서문중수기’다. 1958년에 고쳐 새롭게 태어난 대서문에 관한 이야기다. 건국과 치적도 새겨진 장문의 국한문 혼용체다.
1872년 북한산성을 관리하는 총융청에서 고종(재위 1864~1907)에게 아뢴다. '간밤에 본성 대서문 내의 민가에 호랑이가 들어 사람을 물어 죽였다 합니다. 그래서 총과 활을 잘 쏘는 아병(牙兵) 30명을 장교가 거느리고 가서 사냥을 하고자 합니다. 감히 아룁니다.'(고종시대사, 고종 9년 6월 20일)
대서문 옆에 수문이 있었다. 숙종은 이 수문을 찾았다. 하지만 1915년과 1925년 홍수 때 사라졌다. 특히 1925년의 홍수는 을축년 대홍수라 부른다. 7월, 8월, 9월 석 달간 네 차례에 걸쳐 ‘한강의 흐름이 바뀌고 용산역 기차가 잠길 정도’로 내렸다. 조선총독부 한해 예산의 60% 가까운 돈이 수해 복구에 쓰였다. 북한산 속 ‘북한동’에서 대대로 살아온 A(91)씨는 “산에 없던 계곡이 생기고 일제 강점기 때 방치돼 스러지기 일보 직전이었거나 일부 스러진 산성 내 성문의 문루, 행궁, 삼군문 유영지, 창고(상창·중창·하창 등), 성랑(城廊·초소), 사찰 등이 사라졌다”고 말했다.
수문은 이미 18세기에 사라졌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1745년 성능 스님이 만든 ‘북한도’에 수문이 없기 때문이다.
숙종은 행궁에 들른 뒤, 동장대로 향했다. 1915년 7월 집중 호우 때 허물어진 것으로 보이는 동장대는 복원하려고 해도 ‘모델’이 없었다. 그래서 수원 화성의 서장대를 본 따 서울 600주년 기념으로 1996년에 복원했다. 편액은 조순 당시 서울 시장이 썼다.
숙종은 대동문을 통해 환궁했다. 대동문 편액은 숙종이 썼다. 대성문 편액도 마찬가지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숙종의 글씨를 가져와 새겼다. 편액 좌측에 ‘숙종어필집자(肅宗御筆集字)라 새겨진 이유다.
어릴 적 숙종과 북한산성을 찾았던 영조(재위 1724~1776)는 1760년 도성 창의문을 통해 북한산성 대성문으로 들어갔다. 행궁에 들어 숙종이 쓰던 포진(鋪陳·방석 또는 돗자리)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영조는 북한산성을 찾은 뒤 대성문을 닫아버렸다. 대신 옆의 소남문(혹은 문수문, 현재의 대남문)을 정문으로 승격시켰다.
'대'자를 얻은 대남문을 고쳐야 했다. 마침 ‘미침병’으로 군에서 방출된 한도형이란 자가 북문에 불을 질러 문루가 무너졌다. 부호군(종4품 무관직) 구선복은 영조에게 아이디어를 냈다.
‘북한산성의 북문루를 현재 경영하여 고쳐 세우고 있으나…그 재목과 기와로 문수문의 문루를 새로 건립하는 것이 일이 매우 타당하기에 감히 이를 앙달합니다.’(비변사등록, 1765년 4월)
구선복의 안이 채택되면서 북문은 현재까지도 문루 없이 북풍을 그대로 맞고 있다.
북한산성 조사·연구에 참여한 한 관계자는 “문화재에 개인의 낙관을 넣는 게 부당하다는 민원이 있었던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지난 30년간 대남문을 200여 차례 찾았다는 한 등산객은 “2000년대 초반까지는 낙관이 있었지만, 어느 날 사라졌다”고 말했다.
김홍준 기자 rimrim@joongang.co.kr
청나라 “해적 대비하라” 전갈에 6개월 만에 북한산성 쌓아
조선은 이미 임진왜란 직후부터 한양과 가까운 곳에 산성을 쌓을 필요성을 느꼈다. 북한산성 축조의 배경은 복합적이다. 1637년 병자호란을 치르고 청나라와 맺은 정축약조에는 ‘(조선은) 성지(城池)를 개축·신축하지 말 것’이라는 조항이 있었다. 게다가 붕당정치로 조정 내 찬반이 갈리면서 이후 80년 가까이 산성 축조는 실행하지 못했다.
한양의 인구는 1657년 8만명에서 1717년 19만명으로 급격히 증가했다. 이에 따라 17세기 후반 이후 사회 불안도 커지며 도성민들은 안위를 걱정하게 됐다. 정치적으로는 탕평책이 적용되면서 왕권 강화가 추진됐고, 이를 위해 군영 정비가 이뤄지면서 기존의 방위체계도 수도 외곽에서 도성으로 탈바꿈했다.
숙종은 임진왜란 때처럼 유사시 백성을 버릴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런 점에서 기존의 강화도와 남한산성은 문제가 있었다. 1710년, 청은 랴오둥반도 근처에서 해적이 출몰하자 조선에 ‘대비하라’는 전갈을 보냈다. 북한산성 축조 찬성파인 숙종은 탄력을 받았다. 근데, 신하들은 이번에도 찬반으로 갈렸다. 숙종은 결단을 내렸다.
‘왕이 말하기를 ‘계획은 비록 많더라도 결단은 혼자 하고자 한다. 도성 아주 가까운 곳에 이러한 천험의 땅이 있으니, 만약 지금 수축하지 않는다면 다시 어느 때를 기다리겠는가?’ 하고 성을 쌓기로 결정하였다.’(조선왕조실록 숙종 37년)
이미 삼국시대부터 터가 다져진 까닭에 북한산성은 6개월 만에 속전속결 완성하게 됐다.
한양의 인구는 1657년 8만명에서 1717년 19만명으로 급격히 증가했다. 이에 따라 17세기 후반 이후 사회 불안도 커지며 도성민들은 안위를 걱정하게 됐다. 정치적으로는 탕평책이 적용되면서 왕권 강화가 추진됐고, 이를 위해 군영 정비가 이뤄지면서 기존의 방위체계도 수도 외곽에서 도성으로 탈바꿈했다.
숙종은 임진왜란 때처럼 유사시 백성을 버릴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런 점에서 기존의 강화도와 남한산성은 문제가 있었다. 1710년, 청은 랴오둥반도 근처에서 해적이 출몰하자 조선에 ‘대비하라’는 전갈을 보냈다. 북한산성 축조 찬성파인 숙종은 탄력을 받았다. 근데, 신하들은 이번에도 찬반으로 갈렸다. 숙종은 결단을 내렸다.
‘왕이 말하기를 ‘계획은 비록 많더라도 결단은 혼자 하고자 한다. 도성 아주 가까운 곳에 이러한 천험의 땅이 있으니, 만약 지금 수축하지 않는다면 다시 어느 때를 기다리겠는가?’ 하고 성을 쌓기로 결정하였다.’(조선왕조실록 숙종 37년)
이미 삼국시대부터 터가 다져진 까닭에 북한산성은 6개월 만에 속전속결 완성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