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런 게 있었네요.”
사찰 건물의 좌우명 새겨진 문구 #한자에 뜻 어려워 지나치기 일쑤 #'패싱'하면 오래된 기와집만 본 것
지난달 27일 강화도 마니산의 정수사. 경기도 고양시에서 왔다는 50대 중반 부부는 사찰에 주련(柱聯)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단다. 새해가 밝자 수능을 보게 되는 막내딸을 데리고 와 치성을 드린 부모도, 병상에 누운 노모의 건강을 기원하는 60대 남성도 주련을 미처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주련은 그곳에 있었다. 수십 년, 수백 년 동안.
주련은 사찰과 궁궐, 고택 등의 기둥에 걸어놓은 연구(聯句)를 말한다. 고전 문헌에서 따오거나 스승·지인의 가르침을 받아 쓰기도 했고 자신이 직접 짓기도 했다. 널빤지에 새겨져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이어지며 이야기와 깨달음이 펼쳐진다. 이광호 연세대 철학과 명예교수는 “주련은 건물의 참된 의미를 알 수 있는 메시지”라며 “선인들이 일상에서 수양에 힘쓰고 운치를 누렸다는 문화의 발자취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 “주련 관심 없으면 승려도 눈뜬장님”
정수사 대웅보전은 600여 년 전(1423년·세종5년) 만들어졌다. 통나무를 깎아 새긴 꽃병 문양 문창살 뒤 부처는 바다를 향해 미소 짓고 있다. 툇마루도 있는데, 이런 형식의 법당은 안동 개목사 원통전을 포함해 전국에 두 곳뿐이다. 기둥에 주련이 걸려 있다.
‘마하대법왕(摩訶大法王) 무단역무장(無短亦無長) 본래비조백(本來非皂白) 수처현청황(隨處現靑黃).' 부처님은 짧지도 길지도 않으시며 본래 희거나 검지도 않으며 모든 곳에 인연 따라 나타나시네.
양근모(58·필명 한민) 도서출판 청년정신 대표도 2000년대 초반 어느날 정수사를 찾아 이 주련을 봤다. 성공에 집착했다. 너와 내가 옳으냐 그르냐를 따지느라 피폐해져 있었다. 주련을 찬찬히 뜯어봤다. 길다, 짧다, 검다, 희다는 것은 어리석은 나의 분별이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었을까. 그는 “성공과 이익을 향한 욕망 대신 맑음과 자유를 찾아보게 됐다”고 말했다.
부산 금정산 범어사 대웅전의 주련은 정수사 대웅보전의 그것과 똑같다. 성철 스님(1912~1993)의 스승인 동산 스님(1890~1965)이 범어사에서 입적 1주일 전 “부귀영화가 무엇이란 말인가. 헛욕심들 버리시게”라며 법문을 설파했다. 주련은 사찰의 좌우명이다. 정수사도, 범어사도 질긴 탐욕의 불을 끄자고 말하는 것이다.
주련은 쉽지 않다. 눈에 띄지도 않는다. 산사를 찾은 이들에게는 그대로 지나치는(패싱) 대상이 될 수 있다. 정수사 외에도 강화도 정족산 전등사, 북한산 도선사, 도봉산 망월사를 찾은 20여 명에게 물어봤지만, 주련의 존재 자체를 모르거나, 이전에 주련을 봤어도 뜻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속리산 법주사 조실인 월서(84) 스님은 “20세에 출가 후 해인사를 들락거렸어도 주련은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며 “나도 눈뜬장님이었던 셈”이라고 말했다. 그는 전국 30여 곳의 사찰 주련에 관한 이야기를 묶어 『깨달음이 있는 산사』를 펴냈다. 월서 스님은 “해인사 법보전에 걸린 주련을 보고 느낌이 왔다”고 말했다. ‘원각도량하처(圓覺道場何處) 현금생사즉시(現今生死卽是).' 깨달음이 있는 곳은 그 어디인가? 지금 생사가 있는 이 자리다.
월서 스님은 “깨달음은 쉬운 곳, 가까운 곳에 있다는 의미”라며 “불자가 아니어도 관심을 갖고 천천히 곱씹는다면 누구든지 주련의 의미를 알 수 있다는 말과 일맥상통한다”고 밝혔다.
한민 작가는 “그 전에 주련을 보았으되, 본 게 아니었다”고 말했다. 주련을 살펴보고 음미하지 않으니 그동안 사찰에 가서도 오래된 기와집만 보고 온 것이라고 털어놨다. 한민 작가는 이후 『산사의 주련』을 3권까지 냈다. 그는 “그저 절 한 바퀴 돌고 나온다면 아무런 감동이 없는 발품일 뿐”이라며 “사찰의 역사와 이야기를 알고 이해하면 주련에 다가서기 쉽다”고 귀띔했다.
# “역사·이야기와 버무려야 이해 쉬워”
사찰에 가는 것은 그 공간에 서려 있는 역사와 이야기와의 공감을 위해서이기도 하다. 강화 정족산 전등사에는 이야기 두 토막이 담겨 있다.
승려들이 산으로 쫓겨 올라간 조선 시대, 전등사는 열 가마도 안 나오는 은행을 공물로 스무 가마 바쳐야 했다. 도력 높은 추송 스님을 인근 백련사에서 데려와 사흘간 기도를 드렸다. 그 후로 전등사에는 은행이 열리지 않는다. 공물을 낼 일도 없어졌다.
대웅보전 처마 밑의 나부상은 대웅보전(1622년·광해14년 준공) 건축을 맡은 도편수의 ‘치정 복수극 작품’이었다. 자신의 돈을 갖고 튄 주막 여인네는 영원히 벌거벗은 모습으로 지붕을 떠안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불신보편시방중(佛身普遍十方中) 월인천강일체동(月印千江一切同).' 부처님은 온 세상에 천 개의 강에 달그림자 비치는 것과 같다.
깨달음은 너도 나도 가능하다. 업보의 무게를 감당하며 벌서는 나부상도 따지고 보면 부처와 다름없다.
전등사 대웅보전은 지난해 12월부터 공사 중이었다. 기와 교체 작업이라니, 이참에 나부상이 업보에서 벗어날리는 없을 듯 하다. 이어지는 대웅보전의 주련은 이렇다. ‘사지원명제성사(四智圓明諸聖士) 분림법회리군생(賁臨法會利群生).' 사지에 밝으신 모든 성스러운 분들 큰 법회에 오셔서 많은 중생 이롭게 하네.
마침 한 아이가 신발을 벗고 이 두 개의 주련 사이를 통해 대웅보전에 들어갔다. 깨달음에는 남녀노소가 없다.
한민 작가는 기자의 요청에 지역별로 6곳의 사찰을 추천했다. 사명대사가 임진왜란 때 통도사에서 강탈당한 진신사리를 되찾아 봉안했다는 금강산 건봉사(강원), 백범이 대웅전 주련을 보고 나무를 심었다는 태화산 마곡사(충청), 한때 수행을 위해 이불이 없었던 도봉산 망월사(서울), 매화 향 그득할 때 내려가니 만암 스님(1875~1957)의 ‘이뭣고’라는 화두가 머리에 쿵 박혔다는 백암산 백양사(전라), 주련과 불경을 한글로 만드는데 평생을 바친 운허 스님(1892~1980)이 기거한 운악산 봉선사(경기), 대웅전의 주련을 보면 문득 달을 쳐다보게 된다는 영축산 통도사(경상)다.
하지만 한민 작가는 “절은 저마다의 운치와 의미가 있어 리스트라는 건 무의미하다”고 밝혔다.
# “주련 입문 1단계는 스마트폰 이용”
어렵지만 주련을 이해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한민 작가는 “절의 외형은 어디든 비슷한데, 주련은 각 사찰의 존재 이유를 설명해 주는 차별화 포인트”라고 말했다. 그는 “주련을 곱씹으면 사찰은 전혀 새로운 공간으로 다시 태어난다”고 덧붙였다. 월서 스님은 “주련 없이는 옷만 걸친 상태, 또는 껍데기만 본 채 사찰의 절반도 느끼지 못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한 사찰 주련 전문가는 “불교는 형상을 갖고 있지 않지만, 불교가 사회와 관계를 갖게 되면서 가람이라는 건물 배치의 형상이 필요했는데, 주련이 없다면 각 건물의 의미를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사찰들도 좀 더 쉬운 주련을 선보이며 방문객을 맞이하고 있다. 도봉산 망월사, 강화 정족산 전등사 등은 주련 밑에 해석을 달아줘 이해하기 쉽게 해주고 있다. 운악산 봉선사, 안성 서운산 석남사, 서울 삼청동 칠보사, 지리산 화엄사 등은 아예 한글로 주련을 만들어 걸기도 했다.
주련이 수십, 수백 년 비바람에 맞다 보니 일부는 글자를 알아보기 어렵게 마모되거나 소실되기도 했다. 이광호 교수는 “민족 유산인 만큼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보존·관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한 사찰 전문가는 “요즘 불자들이 한문을 이해하기 어렵다 보니 불교가 더 멀게 느껴진다”며 “기존 문화재는 보존하되 한글 편액과 주련을 늘려 대중화에 나서야 할 때”라고 밝혔다.
월서 스님은 주련 입문 1단계를 알려달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하며 미소 지었다. “아, 스마트폰이 있잖아요~.” 깨달음은 쉬운 곳에 있었다.
김홍준 기자 rimrim@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