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소미아 종료가 유력시되던 정부 안팎의 기류에 변화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 것은 전날인 21일쯤이었다. 오전 열린 청와대 국가안보회의(NSC) 상임위원회에서 치열한 토론이 벌어졌고 결론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 자리에서 특히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지소미아를 종료할 경우 외교적 후폭풍에 대한 우려를 강하게 표명했다고 한다. 22일 오후 NSC 상임위원회 전까지도 상황은 유동적이었다. “아침까지만 해도 지소미아를 종료할 것인지 아닌지는 50대 50이었다”고 외교부 고위 당국자는 전했다.
벼랑 끝서 반전 거듭 실마리 제공
미 국무·국방부 고위급 릴레이 방한
일본엔 “한국에 번복 명분 줘야” 설득
외교가 “다리 부러진 데 반창고 격
본질적으론 달라진 것 없다” 지적도
이례적으로 문재인 대통령까지 참석한 이 날 NSC 상임위원회에서 결국 지소미아 종료의 ‘조건부 유예’로 가닥이 잡혔다. 회의는 1시간 30분도 채 되지 않아 짧게 끝났다. 문 대통령의 결단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는 대목이다. 회의 직후 강 장관이 일본 나고야에서 열리는 주요 20개국 외교장관회의에 참석하는 것으로 결정됐다. 지소미아를 종료할 거라면 강 장관이 참석하기 곤란한 자리였다. 이후 이상렬 외교부 아시아태평양국장대리가 주한 일본 대사관 관계자를 외교부 청사에서 만나 지소미아 종료 유예의 뜻을 담은 외교 공한을 전달했고, 오후 6시 양국이 동시 발표하면서 유예의 효력이 발생했다.
유예 결정의 뒤엔 역시 미국이 있었다는 게 외교가의 상식이다. 21일(현지시간)부터 워싱턴에서는 “한·일 양국이 체면을 차리면서 지소미아 종료를 막을 수 있는 중재안이 통할 것”이라는 낙관론이 조금씩 나오기 시작했다. 데이비드 스틸웰 미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가 19일부터 일본에서 외무성 당국자들을 만나 막판 설득 작업을 벌이던 중이었다.
22일 한·일의 발표는 미국이 실제 7월 말 양국에 제안했던 ‘동결 합의(standstill agreement)’와 유사한 측면이 있다. 한국은 지소미아를 건드리지 않고 일본은 추가 수출 규제를 멈추는 식으로 상황 악화를 일단 멈춘 뒤 대화부터 하자는 것이었다. 당시 한국은 이를 환영했지만, 일본이 거부했고 결국 정부는 8월 22일 지소미아 종료를 결정했다.
방미한 이인영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도 21일(현지시간) 기자들과 만나 “최근 미국이 한국 측에만 입장 변화를 요구한 게 아니고 일본 측에도 입장 변화를 요구하며 지소미아와 관련해서 한·일 간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소개했다.
하지만 일본이 움직인 데는 나름의 계산을 끝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외교가에서는 나온다. 한 전직 외교관은 “일본 입장에선 한·미·일 안보 협력의 핵심 기제인 지소미아를 살리기 위해 한발 물러섰으니 미국에 할 말이 생겼고, 향후 한국과의 협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이를 활용할 수도 있다”고 평가했다. 이 외교관은 또 “사실 이번 합의는 다리 부러진 데 반창고를 붙인 모양새”라며 “본질적 측면에서는 달라진 것이 없다”고 주장했다.
정부가 지소미아에서 산소호흡기를 떼는 것을 유예하며 파국을 막았지만 한·미 간 신뢰 관계에는 흉터가 남았다는 지적도 있다. 미국이 ‘레드라인’으로 여겼던 지소미아를 건드리면서 한국이 한·미·일 안보 협력에서 떨어져 나올 수 있다는 신호를 줬다는 것이다. 미 조야에서 우려해온 한국은 한·미·일 안보협력의 ‘약한 고리’라는 점이 새삼 확인됐기 때문이다. 신범철 아산정책연구원 안보통일센터장은 “정부가 이번에 상당 부분 양보하는 대승적 결단을 내린 것은 사실”이라며 “하지만 돌이켜보면 8월 22일 이런 상황을 예측하지 못해 결국 국격 손실을 불렀다는 평가가 나올 수 있다”고 지적했다.
유지혜·이근평 기자, 도쿄=윤설영 특파원 moonbright@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