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립·은둔 청년: 잊혀진 존재
사람과 관계를 맺지 않거나 집 밖으로 나오지 않는 고립·은둔 청년이 전국 54만 명, 청년 인구의 5%에 달한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습니다. 중앙일보는 고립·은둔 청년 12명을 만나 심층 인터뷰했습니다. 그동안 어디에도 말 못하고 삼키고 있던 이야기입니다. 실은 그 누구보다 세상 밖으로 나와 평범한 삶을 살고 싶어 하는 청년들의 목소리를 전합니다.
“하루 종일 내가 하는 말이 ‘담배 주세요’ 한 마디밖에 없구나. 그런 하루가 오늘 만이 아니라 어제도, 그제도 그랬구나.”
8년째 은둔 생활 중인 정민호(가명·34)씨는 3년 전 집 근처 편의점에서 담배를 사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작가 지망생인 그가 6평 남짓 원룸 한켠에 수북이 쌓인 책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오랫동안 말을 안 했더니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그 표현이 목에서 안 올라와요. 더 이상 사람과 대화를 할 수 없을 것 같은 공포를 느꼈어요.” 책장 옆 너덜너덜해진 공책에는 그가 지난 8년간 혼자 글을 쓰고, 고친 흔적들이 남아있었다.
서울의 한 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한 뒤 출판사에 다닐 때만 해도 대화는 정씨의 낙이었다. 상사의 괴롭힘으로 회사를 그만 둔 뒤에도 학과 사무실 인턴으로 일하며 주변과의 관계를 이어갔다. 밥 먹자고 부르면 나오는 친구들도, 교제하던 애인도 있었다. 그런 그의 삶에서 대화가 사라지기 시작한 건 2015년부터였다. 인턴 계약이 끊기면서 ‘관계 절벽’이 찾아왔다. “2~3년이 지나니 함께 어울리던 친구들도 다 졸업해 떠났다. 혼자 남겨진 느낌이었다.”
스며들듯 시작된 은둔 생활이 8년째 이어질 줄은 정씨도 몰랐다. 그 사이 우울증·조울증·공황장애가 찾아왔다. 수년간 정신과 약에 의존해온 그는 극단적 선택을 상상한 날도 많았다. “남들이 ‘쟤는 왜 저래’라고 생각한다고 느낄 때 심리적으로 더 격렬한 반응이 일었다.”
고립 위기 청년 54만 명…전국 첫 실태조사 발표
고립·은둔 청년 문제는 특정 계층·성별 이슈라기 보다는 사회 전반 걸친 문제라는 게 이번 조사에서 드러났다. 대학을 졸업한 뒤 사회생활을 시작할 20대 후반~30대 초반에 고립된 이들이 약 70%로 가장 많았다. 학력 수준은 대졸(75.4%), 고졸(18.2%), 대학원 이상(5.6%), 중졸 이하(0.8%) 등의 분포를 보였다. 여성의 비율(72.3%)이 남성(27.7%)보다 약 2.6배 높았지만, 조사의 책임연구원인 김성아 한국보건사회연구원 부연구위원은 “여성이 남성보다 고립·은둔에 대한 자각이 높거나 긴 응답을 완료하려고 노력할 가능성이 높을 뿐, 실제 성비는 비슷하다”고 설명했다.
은둔할수록 늘어나는 ‘극단 선택’…위험 신호
고립·은둔 청년 4명 중 3명(75.4%)이 자살 생각을 한 적 있다는 사실도 이번 실태조사를 통해 드러났다. 고립·은둔 기간이 길어질수록 자살에 대한 생각도 커졌다. 고립 기간이 3개월 미만인 경우 자살 생각률이 64.3%였지만, 고립 기간이 10년이 넘은 청년들은 89.5%가 자살을 생각하고 있었다. 실제 자살 시도까지 이어진 경우도 4명 중 1명(26.7%)꼴이었다. 민간 지원 단체 사단법인 씨즈 김영호 총괄팀장은 “안부를 확인하던 청년이 약물로 자살을 시도해 병원에 입원한 경우도 있다. 다른 기관의 의뢰를 받아 한 청년을 찾아갔는데 이미 스스로 목숨을 끊은 뒤였다”고 말했다.
이번 실태조사를 맡은 책임연구원 김성아 보건사회연구원 부연구위원은 “주관식 응답에 ‘제발 살려 달라’고 적은 청년들도 있었다”며 “고립 청년 문제는 청년 자살, 고독사 등으로 이어진다. 사회 전반적인 활력이 떨어지고 경제활동을 하지 못해 점차 빈곤해지는 악순환이 반복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