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REPORT
청년은 이 표석을 곧 다시 볼 줄 알았을까. 경북 문경과 충북 괴산을 잇는 조령(문경새재·632m)의 ‘산불됴심표석(경북도문화재자료)’은 영·정조대에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시대에 만든 한글비석 5기(우리나라 4기, 일본 1기) 중 하나다.
많이, 크게, 시도 때도 없이 났다
공중진화대원·주민이 겪은 산불
비석이 만들어진 200여 년 전이나 지금이나 산불은 짧은 시간에 사람과 산림·주거지를 할퀴어 몹쓸 거죽으로 남긴다. 표어처럼 ‘가꾸는데 30년 사라지는데 3초’다. 그 산불이 무시무시해지고 있다.
지난 1일부터는 봄철 산불조심 강조기간이다. 한 주 뒤인 3월 4일은 역대 최악으로 꼽히는 울진·삼척 산불이 발생한 지 1년이다. 중앙SUNDAY는 산림청 산불피해대장을 바탕으로 지난해 산불 현황을 분석했다. 산림청의 최종 발표와 차이가 있을 수 있다. 불에 기꺼이 뛰어들어 진화에 나선 이들과 불 앞에서 망연자실했던 이들의 기억도 함께 실었다.
#산불은 숨 돌릴 틈을 주지 않는다
당시 산불진화 일지에는 급박함이 묻어 있다. 이 대원이 1.3㏊를 태운 충남 아산 산불을 진화하자마자 긴급 무전이 날아왔다. 오후 9시였다. 최악 산불 중 하나로 꼽히는 강원도 고성 산불이 났다. 이튿날(5일) 오전 8시 30분 다시 강릉 옥계로 이동했다. 이 대원은 2박 3일 산불과의 사투를 벌이고 6일 오전 9시에야 ‘퇴근’했다.
하지만 그는 몇 시간 뒤 다시 등짐펌프(15㎏)와 불갈퀴·야전삽 등 30㎏에 달하는 각종 장비를 지고 헬기에서 밧줄을 타고 내려와야 했다. 2박 3일 진화는 예사다. 나흘 뒤에야 산불도 숨을 골랐다.
이 대원은 이날도 강원도 양구에서 2박 3일간 진화 작업을 벌였다. 이렇게 지난해 4월 한 달간 발생한 산불은 177건. 지난해 산불 740건 중 23.9%다. 2021년 4월도 96건으로 한해 산불 27.8%가 집중됐다.
하지만 이시영 강원대 방재전문대학원 명예교수는 “4월은 산불이 가장 많은 달이지만 최근 5~6년간은 장마철을 빼고는 연중 발생하는 경향”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2월 140건(18.9%, 2012년~2021년 평균 12%), 5월 114건(15.4%, 10%)이 발생했다. 특히 5월 산불 비중이 늘면서 산불조심강조기간을 6월 15일까지 한 달 늘리자는 말도 나온다. 지난해 5월 31일 난 ‘밀양 산불’은 이 주장에 힘을 실어준다.
“어이구, 그러게 왜 올라갔능교.”
지난 15일 경남 밀양 부북면 화산마을의 김할머니(72)는 한숨을 토했다. 현장을 찾았던 기자는 ‘정말’ 토했다. 부북면은 지난해 5월 31일 대형산불이 난 곳이다. 3박 4일에 걸쳐 번졌다. 초속 11m의 강한 바람은 방향을 바꿨다. 남동풍이었다가 북서풍으로 돌변했다. 불길은 북쪽으로 올라갔고 남쪽으로도 내려왔다. 밀양구치소 재소자 384명을 대구교도소로 옮기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밀양시청도 덮칠 기세였다. 밀양 시내에서 커피점을 운영하는 김모(30)씨는 “연무로 시내가 온통 갈색이었다. 세상의 종말이 온 줄 알았다”며 “물안경을 찾아 쓰고 마스크를 두세겹으로 해도 안 되더라”고 말했다. 산불은 661㏊를 초토화했다.
산에 들어선 지 10분도 안돼 구토가 치밀었다. 숨돌릴 틈이 없었다. 이 마을 다른 할머니는 “홀라당 다 타버려서 더 탈 게 뭐 있겠소”라며 한숨을 쉬었다.
#산불은 눈물을 만든다
지난해 산불 740건 중 이런 대형산불이 11건 일어났다. 최근 10년간(2013~2022년) 대형산불 22건 중 절반이 한해에 일어난 것. 지난해 총 피해면적은 2만4782㏊(247.82㎢)인데, 대형산불 11건이 그중 96.9%인 2만4016ha를 삼켰다. 서울 면적(605㎢)의 40%가 탄 것이다.
이시영 교수는 “대부분의 산불은 인위적(입산자 실화, 쓰레기 소각 등)으로 발생하지만 이를 키우는 것은 최근 기후 변화로 인해 부쩍 건조해진 대기와 토양, 잦아진 강한 바람”이라며 “게다가 한국의 산림은 60년 넘는 녹화사업을 통해 자랄 대로 자라 오히려 대형산불이 발생할 ‘세팅’이 된 상태”라고 꼬집었다. 이 교수는 그러면서 "불에 약한 소나무 같은 침엽수 대신 불에 상대적으로 강한 굴참나무·느티나무·은행나무·떡갈나무 등 활엽수를 심어 피해를 최소화하고 솎아베기·가지치기·산물수집 등을 통해 강한 바람에 불똥이 날아가 새로운 산불을 만드는 ‘비화(飛火)’ 현상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동규(41) 산림항공본부 산불진화헬기 기장은 “안동 인금리 산불은 강풍을 타고 급격하게 번졌는데, 양간지풍(강원도 양양과 간성 사이의 험한 바람)이 점점 남하하는 것 같다”고 밝혔다. 실제 대형산불도 남하하는 추세다. 최근 10년간 발생 건수를 보면 2013~2019년 7년간 8건 모두가 강원에서 발생했는데, 2020~2022년 3년간은 14건 중 11건(79%)이 영남권에서 발생했다. 겨울철 북서 계절풍이 불면, 소백산맥의 서쪽 사면은 강수량이 많지만, 동쪽 사면은 겨울 평균 강수량이 연평균 강수량의 6% 내외에 그쳐 겨울 가뭄을 겪기 쉽다. 그래서 작은 불씨가 물 만난 것처럼 큰불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지난 19일 안동 임동면에서 다시 산불이 났다. 4시간 넘게 1ha를 태웠다.김옥자 할머니는 “산 너머 마을(사월리)에서 났지만,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았는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산불은 희망을 태우고 절망을 키운다
변명근(54) 산림항공본부 정비검사관은 울진·삼척 산불 9박 10일간 낮에는 산불 진화, 밤에는 헬기 정비를 했다. 그는 “그래서 정비검사관을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하는’ 요원으로 부르기도 한다”고 말했다. 이 대원은 “산불은 잠을 자지 않으니까요”라며 열흘간의 진화 작업을 짧게 설명했다.
“대재앙이었죠. 또 닥칠 수 있다는 두려움에 과거형으로 말하기도 어렵고….” 경북 울진군 북면에 거주하는 최임덕(55)씨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는 이어 “대피하라는데, 집과 가축을 놔두고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고 밝혔다. 울진에는 지난해 5월에도 대형산불(229㏊)이 났다. 지난해 울진 피해 면적은 1만6531㏊로 가장 넓다. 2위 강릉(4223㏊)의 4배에 가깝다.
이 휴게소 건너편. 검게 타버린 금강송 사이의 평지에 묘가 있다. 이곳에 부모님을 모신 남성은 “묘가 다 타버려서 죄송해서 어쩌나”라며 절망하고 있었다. 강릉 옥계 산불을 낸 60세 남성은 징역 12년을 선고받았다. 항소도 기각됐다. 산불 방화는 7년 이상 1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실수로 내도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000만원 이하의 벌금이다.
국토연구원은 지난해 11월 인위적 원인과 기상 원인을 분석해 양평·울주·남양주·홍천·화성 등을 산불 발생빈도가 높은 곳으로 꼽았다. 지난해 산불 건수가 급격히 늘고 대형화 추세가 뚜렷해지면서 산림청은 현재 48대인 진화헬기를 2027년까지 58대로, 현재 435명인 산불재난특수진화대를 2223명으로 늘리기로 하는 등 대책 마련에 나섰다.
22일 현재 올해 산불 발생 건수는 91건. 지난해 같은 기간 174건보다 현저히 줄었다. 하지만 서재철 녹색연합 상근 전문위원은 “기후변화로 겨울·봄철에 건조한 날이 많아지면서, 단 한 건의 대형산불이 피해를 어떻게 키울지 예단할 수 없다”고 말했다.
지난해 5월 31일 경남 밀양 부북면. 이은학 대원이 헬기에서 로프를 타고 내려왔다. 30㎏ 장비 중 하나는 도시락. 김밥이 산불 열기에 녹고 있었다. 그가 말했다. “홍천에 두 시간 사투 끝에 우리가 살린 나무를 생각하면 힘이 난다”. 260㎞ 떨어진 강원도 홍천 화초면 성산리. 160년 수령 소나무가 산불로 거죽만 남은 야산에서 홀로 푸른 어깨를 쫙 펴고 있었다.
☞산불전문예방진화대=산림청 혹은 지자체 소속. 산불 예방과 감시, 초동 진화, 뒷불 감시 등의 업무를 맡는다. 산림청은 산불감시원과 분리됐던 직무를 합치고 이름도 이렇게 통일했다. 일부 지자체는 여전히 산불감시원을 따로 뽑는다.
☞산불재난특수진화대=산림청 소속. 산불전문예방진화대의 초동 진화 뒤 기계화 장비를 갖고 본격 투입되는 인력이다.
☞산불공중진화대=산림청 산림항공본부 소속. 헬기를 타고 험준한 지형에 하강해 진화한다. ‘산불재난특수진화대는 육군, 산불공중진화대는 공군’이라는 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