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길 막았다"…지적장애 자녀 성년후견 후회 내뱉은 부모

중앙일보

입력 2023.02.18 09:00

수정 2023.02.18 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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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양재동 가정법원 후견센터. 임현동 기자

성년후견을 받는다는 이유로 요양보호사 자격증 발급을 거부당한 지적장애인에 대해 법원이 성년후견을 종료했다. 민법상 성년후견이 시작된 원인이 ‘소멸’하면 성년후견을 끝낼 수 있지만, 지적장애 등은 완치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에 법원이 종료 청구를 받아들이는 경우는 드물다.
 
서울가정법원 가사54단독 박원철 부장판사는 “의학적으로는 장애가 있더라도 잔존능력을 최대한 활용해 당사자 자기결정권을 존중해야 한다”며 A씨의 성년후견에 대해 종료 결정을 내렸다.

 

“우리가 앞길을 막았다” 법정서 후회 내뱉은 부모

지적장애가 있는 20대 A씨는 노인 돌봄시설에서 계약직으로 일하고 있다. 지난해 11월에는 국가시험인 요양보호사 자격시험에도 응시해 합격했다. 그러나 요양보호사 자격증은 받을 수 없었다. 노인복지법에서 정하고 있는 요양보호사 결격사유에 해당한다는 이유였다.
 
A씨에게 있는 결격사유란 후견인에게 각종 결정을 의존해야 하는 성년후견 신분이라는 것이었다. 고교 시절 장애를 이유로 학교폭력을 당하자 A씨 부모가 2018년 법원에 성년후견 개시를 청구한 것이다.


 
성년후견 제도는 장애가 있거나 나이가 많아 일상적인 일 처리를 하기 어려운 사람에 대해 법원이 성년후견인을 지정하는 제도다. 성년후견 대상이 이상한 계약을 하거나 지나치게 많은 돈을 꺼내 쓰지 않도록 특정 행위에는 성년후견인의 동의가 필요하다. 과거 금치산·한정치산제도를 보완해 생겨난 제도인데, 후견 대상의 의사판단 능력 수준에 따라 성년후견, 한정후견, 특정후견 등으로 나뉜다.

 
사회에 나온 A씨가 성년후견 대상이라는 이유로 꿈을 잃게 되자, 지난해 A씨 어머니는 성년후견을 종료해달라고 법원에 청구했다. “자기결정권을 침해할 뿐 아니라 사회적 낙인을 찍어 자립활동을 방해하고 있는 성년후견을 종료해달라”는 것이다. 
 
A씨가 불편을 겪는 건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못 받는 문제 뿐만이 아니다. 후견 대상 즉 ‘피성년후견인’에게는 수많은 권한이 제한된다. 법원이 별다른 범위를 설정하지 않으면 피성년후견인은 일용품 구입 등 일상생활에 필요하고 대가가 과도하지 않은 법률행위 정도만 허용된다.
 
심문기일에 나온 A씨 부모는 “아이를 도와주려고 성년후견을 개시했는데 오히려 앞길에 걸림돌이 됐다”며 “아이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부모가 다 빼앗은 것 같다”고 했다. “아이가 몇 년간 고생해서 요양보호사 자격을 취득했는데 피성년후견인이라는 사실만으로 취업을 못 해서 힘들다”고도 했다.

 

법원이 응답한 13쪽의 심판문

박 부장판사는 16일 A씨의 성년후견을 종료하면서 이례적으로 긴 심판문을 썼다. 심판문에는 “발달장애인의 경우 자립여건과 환경, 잔존능력의 활용 측면에서 후견이 최소화돼야 한다”고 했다. A씨에게 성년후견이 개시된 사유인 발달장애가 의학적으로 남아있다는 이유로 성년후견을 유지한다면 오히려 당사자 자립을 막는 불합리한 결과를 낳게 된다는 취지다.  
 
그러면서 박 부장판사는 발달장애인 권리보장법과 장애인차별금지법 조항들도 근거로 들었다. “발달장애인의 의사결정 능력이 충분하지 않다고 해도 보호자가 의사결정을 대체할 것이 아니라 당사자의 의사결정을 지원하는 형태로 자기결정권이 존중돼야 한다”는 것이다.
 
“발달장애인이 성년후견인에게 더욱 의존하는 상황이 초래되면 발달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낙인과 소외를 심화시킬 수밖에 없다”고 했다. A씨가 성년후견인 도움 없이도 일상생활이 가능하고, 월급통장도 스스로 관리하는 점 등도 고려했다.

 
박 부장판사는 요양보호사 외에도 성년후견을 결격 사유로 보고 있는 다른 법 조항들도 언급했다. 성년후견이 개시되면 공무원·변호사·변리사·세무사·사회복지사 등 200여 개 자격이나 직업을 취득하지 못한다. 지난해 12월 헌법재판소는 국가공무원이 피성년후견인이 된 경우 당연퇴직하도록 한 국가공무원법 규정이 위헌이라고 판단했다. 박 부장판사는 심판문에서 “개별적인 직무수행능력 유무를 묻지 않고 피성년후견인을 일률적으로 배제해 사회활동 참여를 획일적이고 광범위하게 제한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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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년후견제 10년…전문가들 “종료 판단 유연해야”

 
최근 의정부지법도 50대 지적장애인의 성년후견 종료 청구를 받아들이며 장애인의 자립 가능성과 잔존능력을 최대한 존중하는 취지의 결정을 내렸다. 전문가들은 올해로 도입 11년 차를 맞는 성년후견 제도가 제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후견 종료가 더 유연해질 수 있게 민법을 손질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배광열 변호사(사단법인 온율)는 “우리가 혼자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생기면 그때그때 변호사나 의사 등 전문가를 찾듯이, 피성년후견인들도 후견이 필요할 때만 제도를 이용했다가 어렵지 않게 종료할 수 있게 해야 한다”며 “극히 예외적인 경우에만 후견을 종료할 수 있도록 한 현행법 개정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