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30일 대구의 한 자동차 부품업체의 모기업인 L사가 최종 부도 처리됐다. 사모펀드 A사의 투자금 600억원 중 500억원을 갚지 못해서다. L사 투자자들은 “경영진이 신규 투자 유치 방안이 있는 데도 이를 거부하고 디폴트(채무불이행)를 선언했다”며 소송을 준비 중이다. L사 측도 “자금 마련이 여의치 않았다”며 맞서고 있다. 투자자와 L사 경영진은 각각 대형 로펌을 통해 법률 자문을 받는 등 법정 공방을 예고했다.
R(Recession·경기 침체)의 공포가 현실화하고 있다. 긴축 기조로 돈줄이 마르자 기업과 금융기관 간, 기업 간 분쟁이 급증하면서 로펌들이 바빠지고 있다. 부동산 PF 대출 관련 분쟁, 한계에 봉착한 기업들의 파산·회생 등 법률 서비스 수요가 급증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김앤장을 비롯한 이른바 ‘김광태세율화’(김앤장·광장·태평양·세종·율촌·화우)로 불리는 대형 로펌들은 최근 잇달아 ‘위기대응 태스크포스(TF)팀’을 발족했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14여 년 만의 일이다.
법조계에서는 인플레이션(물가 상승)을 잡기 위한 정부의 긴축 여파로 실물경제가 본격적으로 위축되기 시작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법조계의 한 관계자는 “기업이든 개인이든 분쟁이 생기면 가장 먼저 찾는 게 법률 서비스”라며 “로펌이 바빠지는 건 경제 위기의 전조 현상”이라고 말했다.
부동산 PF ‘뇌관’ 내년 2월 만기 29조, 금융위기 때보다 심각
실제 각종 지표도 경기 침체를 우려를 키우고 있다. 한국의 단기 금융시스템 상황을 나타내는 금융불안지수(FSI)는 올해 10월 이후 ‘위기’ 수준까지 치솟았다. 한국은행이 22일 발표한 금융안정보고서에 따르면 10월 FSI는 위기단계(22 이상)에 해당하는 23.6이다. 코로나19가 확산되기 시작한 2020년 4월(24.7) 이후 2년 6개월 만에 가장 높은 수준이다.
자금이 바닥 난 한계기업에 대한 경고음도 커지고 있다. 금융감독원의 ‘2022년 정기 신용위험평가’에 따르면 올해 부실 징후기업은 185개로 전년보다 25개 증가했다. 특히 회생절차(법정관리)가 필요한 D기업이 20개 확대됐다. 부실징후기업을 업종별로 보면 기계장비(20개), 금속가공(16개), 부동산(15개), 도매·상품 중개(13개)의 순이다.
로펌들은 올해 중반부터 침체의 전조 증상이 감지되기 시작됐다고 입을 모은다. 8월 국내 대형 로펌 중 가장 앞서 ‘기업위기 대응팀’을 꾸린 화우의 박영우 변호사는 “올해 초만 해도 코로나19가 완화하면서 경기 회복에 대한 기대가 커졌지만 5~6월 지나면서 금리 인상과 물가 급등에 급격히 어두워지기 시작했다”며 “기업들의 부도 소문이 돌기 시작하고, 금융사들은 돈을 제때 못 받을까 노심초사하며 자문 요청이 늘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로펌이 주목하는 부실 뇌관은 부동산 PF 대출이다. 연말부터 내년 2월까지 만기 도래하는 부동산 PF 자산유동화기업어음(ABCP)만 29조원에 이른다. 부동산 시장 침체가 가속화할 경우 신용위험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경고가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문제는 부동산 PF 대출이 문제가 됐던 14년 전 글로벌 금융위기 때보다 지금이 훨씬 심각하다는 점이다.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인 2011년 부동산 가격 하락 속에 미분양이 급증하면서 동양건설, 삼부토건 등 중견건설사와 PF 대출을 해준 저축은행이 줄도산한 바 있다.
하지만 2008년에는 PF 대출 채권을 보유한 상당수가 시중은행이었던 반면 지금은 저축은행을 비롯해 신협, 단위농협, 캐피탈사 등의 비중이 높은 편이다. 지평에서 ‘부동산 PF 정상화센터’를 이끌고 있는 이승현 변호사는 “금융위기 때는 PF 대출을 취급하는 주체가 대부분 시중은행이라 충격을 소화할 여지가 있었던 반면 현재 PF 대출을 많이 보유한 저축은행 등은 단 한 건의 손실로도 크게 흔들릴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시중은행들은 하반기 PF 대출을 중단했고, 제2금융권은 최대 연 20%에 가까운 고금리 이자를 재연장 조건으로 내세우고 있다. 내년에 만기 연장 거절이나 대출을 받지 못해 부도의 위험에 직면할 것이라는 우려가 커지는 이유다. 한국건설산업연구원이 지난달 발간한 ‘부동산PF 위기 원인 진단과 정책적 대응 방안’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10월 기준 40개 업체의 사업장 233곳 중 31곳이 공사가 지연되거나 중단된 것으로 집계됐다. 공사 지연 혹은 중단 이유로는 ‘PF 미실행’(66.7%)이 주요 원인으로 꼽혔다. 지평의 이승현 변호사는 “저금리 호황기에 무리하게 투자를 늘린 사업장이 디폴트에 빠질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며 “미리 대응하지 못하면 기업 줄도산 등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수출이 부진한 상황에서 부동산 PF 대출이나 한계기업의 부도가 본격적으로 이어지면 한국경제는 안갯속으로 빠져들 수 있다. 최근 정부가 발표한 ‘2023년 경제정책방향’의 내년 경제 성장률 전망치는 1.6%다. 김정식 연세대 경제학부 명예교수는 “정부는 국민 불안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해 최대한 희망적인 전망치를 발표하는데, 내년 전망치가 1.6%에 그치는 정도로 경기 침체가 우려되는 수준”이라고 말했다. 하준경 한양대 경제학부 교수는 “거품을 덜어내는 구조조정은 향후 건전한 발전을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하다”면서도 “다만 일시적 유동성 부족으로 흑자기업이 도산하는 등 실물경제가 과도하게 위축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