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면에 넓고 깊은 바다가 담겼다. 힘껏 솟구쳐 올랐다가 하얀 포말로 부서지는 파도와 일렁이는 물결이 바다의 속 깊은 이야기를 전하는 듯하다. 그런데 그림 앞에 한 걸음 다가가면 예상치 못한 풍경이 펼쳐진다. 그림 속 파도와 물결은 온통 글씨로 만들어졌다. 깨알같은 글씨로 파도를 만드는 화가 김이오(KIM25)의 그림이다.
서양화가 김25(KIM25) 작가의 개인전 '필연적 조우'가 서울 소공로 금산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다. 2020년부터 작업해온 신작 25점을 선보인다. 모두 바다 형상과 텍스트를 결합한 '텍스트 회화'다.
김이오 개인전 '필연적 조우'
서울 금산갤러리, 총 25점
추상화가의 독특한 실험
그의 그림엔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 허먼 멜빌의 『모비딕』,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아르투르 랭보의 유명한 시 '영원', 메리 올리버의 '파도'라는 시에서 발췌한 문장들이 즐겨 등장한다. 2020년 『어린왕자』의 문장으로 그린 작품엔 어두운 하늘과 바다 사이로 스며든 눈 부신 햇살이 도드라진다. '맑은 영혼이 칠흑 같은 세상을 밝힌다'는 작가의 믿음이 녹아 있는 그림이다. 『모비딕』에서 영감을 얻은 그림엔 먹구름과 거친 파도에 웅장한 기운이 감돈다.
그의 그림은 풍경화일까, 추상화일까. 그러나 그가 글자로 치밀하게 쌓아 올린 파도는 현실의 바다가 아니다. 그는 "내 그림은 자연 현상을 있는 그대로 재현한 게 아니라 추상화로 풀어낸 것"이라며 "문학에서 영감을 받은 그림이 열린 텍스트로 읽히길 바란다"고 말했다.
김허경 미술평론가는 "김 작가의 그림은 추상과 재현, 텍스트와 이미지의 불확실한 경계에 있다"며 "작가는 일렁이는 파도의 안과 밖이 만나는 지점에 텍스트를 써넣었다. 시적 상상력과 만난 그림 속 파도는 그 흔들림으로 시적 울림을 만들어낸다"고 썼다.
김 작가는 지난해 12월 미국 뉴욕 미즈마&킵스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열었고, 올해 두바이 아트페어(3월)에 신작을 처음 선보여 호응을 얻었다. 그는 홍익대 서양화과 학부(1987)와 석사(1991)를 졸업했으며, 현재 전라남도 광주에서 작업하고 있다. 전시는 6월 2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