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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은주의 아트&디자인

남도 작가 송필용, 빛이 된 강줄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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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이은주 기자 중앙일보 문화선임기자
이은주 문화선임기자

이은주 문화선임기자

“폭포는 곧은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곧은 소리는 소리이다/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를 부른다”.

1959년에 발표된 김수영(1921~1968)의 시(詩) ‘폭포’입니다. 시인은 곧게 쏟아져 내리는 폭포의 물줄기를 보며 굴복하지 않는 정신을 생각했다고 하죠. 얼마 전 서울 삼청동 이화익갤러리 전시장에서 만난 화가 송필용(63)씨가 자신의 그림 앞에서 이 시를 읊었습니다. “이 시를 마음속에 오래 담고 작업해왔다”는 그는 “폭포를 생각하며 마음이 정화되는 느낌을 캔버스에 표현하고 싶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의 크고 작은 캔버스엔 폭포가 담겼습니다. 하지만 그가 ‘폭포’ 얘기를 하지 않았더라면 전혀 물줄기로 보이지 않았을 그림입니다. 위에서 아래로 맹렬하게 쏟아지는 물줄기는 오히려 굉장히 눈부신 ‘빛줄기’에 가깝고, 한 폭의 추상화가 되었습니다.

작가는 처음엔 폭포 주변의 바위와 소나무도 그리며 자연을 재현하는 작업으로 시작했다는데요, 오랜 시간을 거치며 폭포의 형태가 단순해졌다고 합니다. 작가가 물이라 생각했던 것은 보는 이에 따라 빛일 수도 있는 것, 숭고함을 느끼게 하는 도상과 색채로 변화했습니다.

송필용, 역사의 흐름, 2021, oil on canvas, 162x130.3㎝. [사진 이화익갤러리]

송필용, 역사의 흐름, 2021, oil on canvas, 162x130.3㎝. [사진 이화익갤러리]

그의 화면은 잔잔함과도 거리가 멉니다. 어두운 색으로 두껍게 칠한 바탕에 물감이 수십 번에 걸쳐 올려진 캔버스 표면은 치열한 ‘전투’의 흔적을 연상케 합니다. 자기 표면에 조각칼로 문양을 새긴 분청사기의 ‘조화기법’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그는 대나무 칼로 물감을 긁어내며 날카로운 선을 무수히 새겼습니다.

“고향이 전남 고흥”이라는 그는 “옛날 도공이 흙을 빚은 무심하게 그려 넣은 선을 현대적으로 풀어보고 싶었다”고 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보아온 도자기 표면의 역동적인 선들이 지금 그의 캔버스에 시간의 흔적처럼 쌓였습니다.

물줄기에 대한 작가의 특별한 집착은 또 다른 작품에서도 이어집니다. 강줄기를 표현한 ‘역사의 흐름’ 연작인데요, 흙빛 바탕 위에 구불구불 흐르는 물길을 담았습니다. 빛을 흠뻑 머금은 강물과 대지의 색채가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대학교 4학년 때 광주에서 5·18을 겪은 그에게 ‘폭포’와 ‘강’ 그림은 우여곡절을 헤치며 앞으로 나아가는 보통 사람들의 삶과 역사에 바치는 헌사가 되었습니다.

작가는 물을 그린 것이라고 주장하고, 그래서 전시 제목도 ‘물 위에 새긴 시대의 소리’인데 그가 표현하려 한 도도한 물줄기는 어느새 빛이 되었습니다. 시간이 켜켜이 쌓여가며 무르익은 작품의 변화가 흥미진진합니다. 작가가 광주 작업실을 벗어나 오랜만에 서울서 선보이는 이번 전시가 특별히 반가운 이유입니다. 전시는 18일부터 31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