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꾸는 스타트업 ① 어필 사이언스
우리는 보통 기후변화, 지구온난화라고 하면 매연으로 가득한 공장이나 자동차, 석탄과 같은 화석연료를 떠올린다. 그런데, 우리 일상에는 기후변화의 또 다른 주범이 숨어 있다. 유통기한이 지났거나 유통 과정에서 상해서 버리는 과일과 같은 농산물이다. 버리는 농산물을 단순히 음식물 낭비쯤으로 생각하면 오산이다. 농산물의 생산·수확·포장·유통과정에 들인 자원과 에너지를 함께 버리는 것이다.
특히 버린 농산물이 매립지에서 썩는 동안 ‘교토의정서’가 정의한 6대 온실가스 중 하나인 메탄가스를 적지 않게 내뿜는다. 통계에 따르면 전 세계에서 이렇게 버려지는 농산물은 전체 농산물 유통 물량의 17%에 이른다. 이를 돈으로 환산하면 1200조원에 이른다고 한다. 특히 아프리카 등지에선 여전히 먹을 게 없어 굶주리는 아이가 많다는 현실을 고려하면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같은 문제에 착안해 혁신적인 제품을 개발해 유니콘(기업가치가 1조원 이상인 비상장 기업)이 된 스타트업이 있다. 금속공학자를 꿈꾸던 미국인 대학원생 제임스 로저스(James Rogers)가 2012년 창업한 어필 사이언스(Apeel Sciences)다. 이 회사는 과일·야채와 같은 농산물의 유통기한을 늘려주는 분말 형태의 특수 코팅제를 개발, 생산하고 있다. 이 코팅제는 농작물의 수분 손실과 산화를 막아 유통기한을 2~3배 늘려준다. 특정 과일의 씨앗과 껍질에서 원료를 추출해 인체에 무해하고, 아무런 맛도 나지 않는다.
한 해 버려지는 세계 농산물 1200조원
제임스와는 세계경제포럼 행사 때 종종 만나 이야기를 나눈다. 회사를 창업할 당시 그는 대학에서 금속공학 박사과정 중이었는데, 어느날 팟캐스트를 통해 굶주리는 아이들에 대한 사연을 들은 게 제품 개발의 시작이었다고 한다. 농산물 유통기한을 획기적으로 늘릴 수 있다면 온실가스도 줄이고 기아(飢餓) 문제 해소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농산물 부패의 원인이 수분 손실과 산화라는 단순한 사실도 이때 알게 됐는데, 그의 머릿속엔 크로미움(Cromium, 원자번호 24번)이라는 화학 원소가 떠올랐다.
스테인레스 제품 생산 때 산화 방지를 위해 크로미움을 넣어 산소 유입 방지막을 형성하는데, 농산물에도 똑같은 원리를 적용하면 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스쳐간 것이다. 하지만 당시엔 전혀 존재하지 않던 시장이었고, 시장 조사를 해봐도 유사 제품을 찾기 어려웠다고 한다. 이 때문에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몰라 1년 넘게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회사 이름이라도 한번 지어보자는 생각에 ‘어필’이라는 사명을 만들었는데, 이때부터 해야 할 일이 하나씩 보이기 시작했다. 사명을 만들고 나니 인터넷 홈페이지 주소(도메인)도 구매해야 하고, 회사 로고도 만들어야 했던 것이다.
2018년 타임지 선정 ‘50대 혁신기업’
우리나라에서는 최근 다양한 기술을 결합한 스마트 농업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공간과 환경의 최적화를 추구하는 수직농원(vertical farming) 업체가 나오기 시작했고, 지자체와 대학은 4차 산업혁명 기술을 농업과 결합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곧 도래할 100억 인구가 100세까지 사는 ‘TMY(Trillion Man Year) 시대’에 안정적으로 먹을거리를 확보하기 위한 시도다. 이와 동시에 어필 사이언스가 제시한 방향처럼 기존 농산물의 낭비를 줄일 수 있는 방안도 TMY 시대를 준비하는 해법이 되지는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