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오래]제사에 조상 숭배 덧씌워 허례허식으로 몰고간 일제

중앙일보

입력 2021.09.16 11:00

수정 2021.09.16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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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송의호의 온고지신 우리문화(109)

추석이 다가온다. 명절에 따르는 차례 문화는 바뀌고 있다. 한국갤럽에 따르면 차례를 지내지 않는 사람은 1992년 8%에서 2021년에는 32%로 크게 늘었다. 코로나 19의 기세는 여전해 그런 분위기를 더 심화할 것이다.

 
명절 차례를 계기로 제사의 의미를 돌아봤다. 제사는 조상 숭배의 의식일까. 예학자 이동후는 『하동상변(霞洞常變)』에서 “제사는 못다 한 효도의 연장으로 그리워하고, 생전의 가르침을 되돌아보고, 자기 행실을 다시 다지는 계기”라고 정리한다. 그러한 정신은 제사 축문(祝文)에 “그리운 마음을 이길 수 없음(不勝永慕)” 등에 잘 담겨 있다. 즉 제사를 지내는 것은 미신도 아니고 우상 숭배도 아니라는 것이다.
 

퇴계 이황 종가의 간소한 설 차례상. [사진 한국국학진흥원]

 
제사에 부정적인 이미지가 덧씌워진 것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였다. 그 이전까지 우리나라 자료에 조상 숭배라는 말은 나타나지 않았다. 일제강점기 들어 일본인의 논문 주제나 당시 우리나라 사람 논문에서 조상 숭배란 말이 등장한다. 일제는 또 ‘선비=양반=착취=서민의 적=타도 대상’이란 프레임을 만들어 조선의 정신적 지주인 선비를 자기 조상이나 파는 자로 이미지를 만들어나갔다.
 
대표적인 정책이 제례 즉 제사를 허례허식으로 몰아간 것이다. 일제는 1912년 산림 보호를 내세워 ‘화장취체규칙’을 만든다. 취체(取締)는 단속을 뜻한다. 1934년에는 가정의례준칙을 만들어 상례와 제례가 허례허식이라며 간소화를 추진했다. 일제는 그 정책을 통해 민족 정서를 분열시키고 항일의 근본정신을 말살하려 했다.


이러한 생각은 광복 이후에도 잔재로 남아 우리의 올바른 의식은 살아나지 못했다. 1969년에는 가정의례준칙이 발표된다. “번잡한 법 의례에 따르는 고루와 낭비가 빨리 시정되고 한편으로 생활이 역사적·사회적 변화에 따라 수정되어 발전하지 않는 한 우리 사회생활은 불편한 번거로움을 면치 못할 것이다.”
 

전북 옥구군이 만들어 배포한 '가정의례준칙' 표지. [사진 송의호]

'가정의례준칙'에 담긴 대통령의 취지문. [사진 송의호]

 
1973년에는 한 발짝 더 나아가 ‘가정의례에 관한 법률’이 공포된다. 시행 24조 중 7개 조가 제사와 관련된 것이다. 제사는 4대 봉사 대신 2대 봉사로 축소됐고 절차는 삼헌(초헌·아헌·종헌) 대신 단헌으로, 또 신주는 사진이나 지방을 쓰도록 규정했다. 물론 이 법률은 현재는 사문화되었다.
 
예학자 이동후는 제사의 현대적 의미를 이렇게 정리한다. “제사를 지내는 까닭은 돌아가신 조상을 공경하고 그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다. 또 가족과 집안의 공동체 의식을 부여해 화목과 단합을 하게 만든다.” 그러면서도 제사의 번거로움을 경계하는 자세는 『예기(禮記)』에서부터 등장한다. “제사는 사랑과 공경스러운 마음으로 정성을 다할 뿐이다. 집이 가난하면 살림의 형편에 따라 제사를 지내고 또 건강에 이상이 있어 제사 지내기가 어려우면 몸 형편을 참작한다. 따라서 재물과 건강이 허락하면 예법을 따르라.” 시대가 변하면 예도 따라 변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 근본정신은 시대가 변해도 한결같아야 한다. 제사의 근본은 정성이다.
 
여기서 다시 추석으로 돌아가면 차례는 돌아가신 날 지내는 기제사와 달리 명절을 맞아 드리는 인사 의례다. 이때 상차림은 음식을 대접하는 기제사와 달리 술과 과일·포를 올리는 것으로 충분하다. 물론 이때도 정성을 담아서다. 명절 차례는 간소하게 차리는 것이 전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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