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오래]‘불사이군’에도 살아남은 길재, 이방원의 동네 선배였다

중앙일보

입력 2021.08.05 11:00

[더,오래] 송의호의 온고지신 우리문화(106)

불사이군(不事二君).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 정확히는 본래 임금을 부당하게 해치고 새로 왕위에 오른 자를 섬기지 않는다는 뜻이다. 고려 말 삼은(三隱)의 공통 가치관이다.

불사이군으로 포은 정몽주는 1392년 개성 선죽교에서 이방원에 의해 피살된다. 목은 이색은 유배를 가야 했다. 또 야은 길재는 고려가 망해 가자 벼슬을 버리고 일찌감치 고향 선산 금오산으로 들어가 백이·숙제처럼 고사리를 캐 먹으며 지냈다. 그러나 야은은 이후 조선이 개국한 뒤 다시 불사이군을 드러내지만 처벌받지 않는다.

경북 구미시 금오산 입구에 세워진 채미정(採薇亭). 야은 길재가 금오산에 은거하며 고사리를 캐 먹은 불사이군 정신을 기리는 정자다. [사진 송의호]

경북 구미시 금오산 입구에 세워진 채미정(採薇亭). 야은 길재가 금오산에 은거하며 고사리를 캐 먹은 불사이군 정신을 기리는 정자다. [사진 송의호]

1400년 조선이 길재를 부른다. 개경에서 낙향한 지 10년 만이다. 조선이 개국한 뒤 이방원은 야은을 불러들여 그의 형인 정종에게 봉상박사 임명을 건의한다. 이방원은 당시 서연관(書筵官)들과 뜻있는 선비를 찾고 있었다. 그때 정자(正字) 전가식이 길재와 고향이 같아 그가 효도하는 이야기를 자세히 하였다. 이방원은 기뻐하며 삼군부에 통첩을 내려 길재를 부르도록 했다.

야은은 뜻밖의 부름을 받고 처음에는 거절한다. 그러나 명령을 받은 고을 벼슬아치들의 성화를 무시할 수 없어 한양으로 올라간다. 그는 실세 이방원을 만나 고사하는 뜻을 전했다. 이방원은 그 말을 듣고 “의로 보아 그대 뜻을 빼앗기 어렵다”며 “그러나 부른 것은 나지만 벼슬을 내린 것은 임금이니 직접 아뢰는 것이 옳다”고 덧붙였다. 길재는 다시 정종에게 “여자에게는 두 지아비가 없고 신하에게는 두 임금이 없으니 고향으로 돌아가 이성(二姓)을 섬기지 않았다는 지조를 지키고 노모를 봉양하다 생애를 마치도록 해 주소서”라고 상소했다.

뜻밖의 벼슬 사양에 정종은 경연에서 권근에게 묻는다. 권근은 “선비는 본래 뜻이 있고 이를 빼앗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였다. 정종은 그 말을 듣고 길재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했다. 이때부터 길재의 충절이 널리 알려졌다고 한다. 길재는 이렇게 정몽주와 달리 고려에 충성하면서도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경북 구미시 도량동 야은의 고향 율리 영당에 모셔진 초상화와 신주. [사진 송의호]

경북 구미시 도량동 야은의 고향 율리 영당에 모셔진 초상화와 신주. [사진 송의호]

길재가 조선 임금 앞에 불사이군을 선언하고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사람과의 관계가 역할을 했다. 길재는 이방원과 남다른 인연이 있었다. 길재가 개경에 머물던 시절 두 사람은 한동네에 살며 동문수학한 사이였다. 길재는 당시 이방원이 따르던 선배였다. 또 권근은 개경 시절 길재의 스승이었다. 사람과의 관계는 이렇게 나랏일을 결정하는 데도 영향을 미친다.

구미 채미정 인근에 서 있는 야은의 ‘회고가’ 시비. [사진 송의호]

구미 채미정 인근에 서 있는 야은의 ‘회고가’ 시비. [사진 송의호]

길재는 당시 한양에서 내려오기 전 말 한 필을 타고 개경을 돌아보며 세월의 무상함을 읊는다.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匹馬)로 돌아드니/산천은 의구(依舊)하되 인걸은 간데없다/어즈버 태평연월(太平烟月)이 꿈이런가 하노라.” 유명한 ‘회고가’가 탄생한 배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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